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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어가기] 왜 힌두교는 소를 신성시하고,이슬람은 돼지를 금기시할까? 1. 힌두교의 '소' –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어머니 같은 존재’ 힌두교에서 소는 신성한 존재야.하지만 그 이유는 종교 교리 이전에‘생활과 생존’에서 나왔어. 소가 가진 역할을 보면 이해돼.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인 우유를 제공하고소똥으로는 연료, 건축재, 농비료로 쓰이지. 소의 힘으로 밭을 갈고 수레를 끄는‘생산 동물’이야.그리고 무엇보다, 죽이지 않고도계속 도움을 주는 존재지. 즉, 사람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 같은 동물’이었던 거야. 그래서 소를 죽이는 것은 곧 생명을해치는 것이라는 가치관이자리잡은 거지.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이렇게 연결돼힌두교의 신들 중 '크리슈나'는 소를 돌보는목동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 소는 신의 탈것, 선물, 현신 등으로 자주 등장해.그래서 지금도 인도 거리에서소가 돌아다녀도.. 2025. 5. 17.
[인도이야기] 세포이 항쟁과 무굴 제국의 최후 인도 역사 속 무굴 제국의마지막 장이 펼쳐질 시간이야.그리고 그 마지막 장은,불붙은 분노, 탄약통에 스민종교적 모욕, 그리고 제국의 상징이무너지는 날로 이어졌지.1857년 세포이 항쟁(Sepoy Mutiny)과무굴 제국의 공식적인 종말,그리고 영국 식민지 통치의 시작점을이야기해볼게.총성과 함께 무너진 왕좌무굴 제국은 이름만 남고진짜 권력은 이미 떠나 있었어. 18세기 중반 이후,무굴 황제는 델리의 성 안에 갇혀 살면서도황제 행세만 할 뿐정치·군사적 실권은 거의 없었어. 그 자리를 차지한 건영국 동인도 회사.이제 그들은 단순한 무역상이 아니라군대를 거느린 사실상 지배자였지.인도인 병사들, ‘세포이(Sepoy)’는 누구였을까?‘세포이’는 동인도 회사 군대에 소속된인도인 병사를 말해.대부분은 힌두교도나 이슬람.. 2025. 5. 17.
[인도이야기] 영국, 왜 인도로 갔을까? 향신료와 부, 그리고 제국의 욕망>1. 향신료와 부의 유혹 – 인도는 부자의 나라였다16세기~17세기 초, 유럽인들에겐인도는 ‘황금과 향신료의 땅’으로알려져 있었어.후추, 정향, 육두구 같은 향신료는작은 양만으로도 큰돈이 되는고급 상품이었고 인도의 면직물,보석, 염료, 차는 유럽 시장에서 폭발적인인기를 끌었지.즉, 인도랑 무역하면 떼돈 번다는 생각이유럽 열강 사이에 퍼져 있었어.2. 포르투갈 – 유럽 최초로 인도 진출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인도 캘리컷(Kozhikode)에 도착해.이게 유럽과 인도를 잇는직접 항로의 개척이었어. 포르투갈은 이때부터인도 해안에 무역항을 만들고,무역뿐 아니라 해상 패권도 장악하려 했지. 하지만 포르투갈의 규모는 작았고,진짜 경쟁은 나중에 시작됐어.3. .. 2025. 5. 16.
[인도이야기] 무굴 제국, 예술의 절정으로 향하다 이제 무굴 제국의 문화적 황금기,눈부신 대리석, 정교한 글씨, 황금빛 궁전.그 중에서도 예술과 건축, 문학의절정을 이룬 시기라는 걸 빼놓을 수가 없어.이 시대는 검보다 붓이 빛나던 시절,황제들은 정복자이자 예술 후원자였고,인도 땅 위에 남긴 문화적 유산은지금도 세계를 감탄하게 해.아크바르 이후, 문화는 더 깊어졌다아크바르가 닦아놓은 정치적 기반 위에그의 후계자들은 문화와 예술의 꽃을 피웠어. >자한기르(아크바르의 아들)회화와 자연주의 예술을 사랑한 황제>샤 자한(자한기르의 아들)건축의 제왕, 타지마할을 남긴 인물 문학, 음악, 건축, 회화가 모두 이 시기에 정점에 달했지.타지마할 – 사랑을 대리석으로 만든 전설샤 자한은 뛰어난 군주이자무굴 제국의 건축광이었어.그에게는 깊이 사랑한 부인,'뭄타즈 마할(Mu.. 2025. 5. 16.
[인도이야기] 무굴 제국-만수브다리 제도(Mansabdari System) 만수브다리 제도란?아크바르 황제가 만든 제도로,관리(신하)에게 계급과 임무를 부여하고,그 계급에 따라 월급과 군사 책임까지정해주는 시스템이야. ‘만수브(Mansab)’는 '지위, 계급'이라는 뜻이야.예를 들어서!어떤 사람이 아크바르에게 충성해서‘5000 만수브’라는 직위를 받았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5000명 규모의 군대를 맡아야 하고,그에 맞는 급여와 특권을 받아,동시에 행정 관리(지방 통치자) 역할도 수행해.왜 만들었을까?무굴 제국은 땅이 크고 민족이 다양했어.그냥 피붙이·귀족에게 맡기면 반란이 일어나기 쉬웠어.그래서 종교·출신 상관없이 ‘능력 중심’으로 관리와 장군을 뽑자! 한 거지.힌두교도든, 무슬림이든, 페르시아인이든충성 있고 유능하면 '만수브'를 줄 수 있었어. 지금으로 치면공무원 등급 + .. 2025. 5. 16.
[인도이야기] 무굴 제국-아크바르 대제, 인도를 통합하다 황제는 왜 기도와 토론을 함께 했을까?이제 본격적으로 무굴 제국의 황금기,그 중심에 선 위대한 황제,'아크바르 대제(Akbar the Great)에 대한이야기를 해볼게. 전쟁으로 얻은 땅을 관용과 지혜로다스렸던 황제,그는 단순한 군주가 아니라,종교와 문화를 넘나든 조율자였어. 전쟁으로 시작된 제국, 정치로 꽃피다1526년, 바부르가 인도를 정복하고그 뒤를 이은 후계자, 아들 후마윤은짧은 치세와 추방, 복귀를 거쳐비틀거리며 무굴 제국의 기틀만 남겼지. 그런 제국을 진짜로 ‘제국답게’ 만든 인물,그가 바로 '아크바르(Akbar)'야. 그는 13살에 황제가 됐어.보통 이런 말 들으면 “꼬마 왕이었나?”싶겠지만, 아크바르는 달랐어. 그는 말 위에서 전투를 배웠고,궁 안에서 학문과 철학을 익혔고,백성의 마음을 얻.. 2025. 5. 15.
[인도이야기] 초승달 깃발이 지고,비단을 두른 제국이 떠오르다-무굴제국 델리 술탄국의 몰락이제 중세 인도 역사에서또 한 번의 큰 전환점,'델리 술탄국의 몰락'과 그 뒤를 이은위대한 제국,무굴(Mughal) 제국의 등장 이야기를 해볼게. 델리 술탄국이 지배했던 인도 땅에,중앙아시아에서 온 또 다른 침입자가발을 디뎠고, 그는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인도 역사상 가장 찬란하고 복잡한제국을 세운 건축자가 됐지.사라진 건 왕조였지만, 흔들린 건 사람들의 삶이었다델리 술탄국은 약 320년간북인도를 지배했어.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늘 불안했지. 왕조가 5번이나 바뀌었고,왕권은 약했고, 각지에 흩어진영주(자민다르)들의 힘이 점점 커졌어. 외세의 침입도 잦았고,행정은 무너지고, 백성들은 피폐해졌지.특히 마지막 '로디 왕조(1451~1526)'는왕위 계승 다툼과 내부 분열로거의 무너질 지경이었어.. 2025. 5. 15.
[인도이야기] 침략으로 일어난 제국, 종교는 폭력을 허락하는가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가 침략을허용하는 교리로 구성된 건 아니야.하지만 역사 속 정치·군사적 확장은종교적 논리를 빌려 정당화되곤 했지. 이건 기독교도 마찬가지였어.사랑을 말한 종교가십자군 전쟁을 벌였듯이,현실에서 종교는 이념적 동기가 되기도,도구가 되기도 했어.1. 이슬람의 기본 교리: 유일신, 평등, 정의, 자비이슬람의 핵심은 다음과 같아. ①신은 오직 알라(Allah) 하나뿐이다. (유일신)②무함마드는 그 마지막 예언자다.③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④자선과 자비, 정직, 공동체적 책임을 강조.즉, 이슬람의 원 교리만 놓고 보면굉장히 윤리적이고 공동체 중심적인 사상이야. 예를 들어, 이슬람은 무슬림에게가난한 이웃을 위해 소득의 일정 부분을 자카트(의무 헌금)로 내라고 명령해.전쟁 포로를 함부로.. 2025. 5. 15.
[인도이야기] 이슬람의 현실 속 타협과 공존 하지만 흥미로운 건,전면 충돌의 완전한 대립과 탄압만있었던 건 아니라는 거야. 시간이 지나면서통치의 현실이 다가왔지. 힌두교도가 인구의 대부분이고,경제, 농업, 상업도 그들이 쥐고 있는데무작정 억누르기만 해선제국이 유지될 수 없었거든. 그래서 일부 술탄들은힌두 세력과 타협을 택했어. 힌두 귀족(자민다르)에게 토지 세금수거 권한을 주고, 힌두 장군에게 관직을 주거나,힌두 여인과의 정략결혼도 종종 이루어졌지.융합 – 문화가 먼저 섞이기 시작했다사람들의 일상에서는종교보다 생계와 공동체가 더 우선이었어.그래서 아래로 내려가 보면시장, 농촌, 공방, 예술, 음악 속에서는힌두와 이슬람이 조금씩 섞이고 있었어. 인도 전통 음악에 페르시아 음계가더해지고, 옷차림도 서로영향을 주고받았고,건축에서는 힌두 기둥에 이슬람 아.. 2025. 5. 15.
[인도이야기] 힌두교와 이슬람, 충돌과 공존의 역사 신을 두고 싸웠지만, 사람들은 함께 살아야 했다1206년, 델리 술탄국이 세워지고이슬람 왕조들이 북인도를 지배하게 되면서,힌두교 중심의 오랜 사회 구조는큰 충격을 받게 돼. 왜냐하면, 이슬람은 힌두교와너무도 달랐거든.힌두교는 다신교로써 수천 명의 신이 있지만이슬람은 유일신 알라가 있었어.그래서 힌두교는 우상숭배가 가능했지만이슬람은 우상숭배는 금지였지. 힌두교는 카스트 제도 안에서계급이 고정되어있었지만이슬람은 신 앞의 평등을 강조했지. 힌두교의 제사는 사제, 브라만을중심으로 이뤄지고,이슬람은 누구나 기도가 가능해.이런 차이는 단순히 종교만이 아니라삶의 방식 자체가 부딪히는 문제였지.충돌 – 사원의 붕괴, 세금과 차별초기 이슬람 왕조의 통치는힌두교를 '이교도'로 간주하는 방식이었어. 주요 힌두 사원들을 파괴.. 2025.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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