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어. 프랑스도 즉시 전쟁에 참여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처럼 오랜 참호전이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번엔 달랐어. 독일은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였고, 프랑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무너졌어. 그리고 그 뒤엔 비시 정부라는 역사 속 가장 논쟁적인 체제와 드골이라는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이 있었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무너진 프랑스
1940년 5월, 독일군은 기갑부대를 앞세운 전격전(Blitzkrieg)으로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순식간에 점령했어. 프랑스는 방어선인 마지노선을 믿었지만, 독일은 그걸 우회해서 아르덴 숲을 통해 프랑스 안으로 깊숙이 침투했지.
그리고 단 6주 만에 파리가 함락돼버렸어. 프랑스 국민들은 경악했고, 정부는 피난길에 올랐지. 군사력으로는 세계 강국 중 하나였던 프랑스가 이렇게 쉽게 무너지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어.
두 개의 프랑스 – 비시 정부와 망명 정부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뒤, 프랑스는 두 개로 나뉘게 돼.
- 북부 프랑스와 파리 지역은 독일군이 직접 통치했고,
- 남부 지역엔 '비시(Vichy) 정부'라는 괴뢰 정부가 들어서게 됐어.
비시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 페탱 원수가 수반이었고, 겉으론 자치정부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히틀러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친나치 정권이었지. 독일과 협력하며 유대인 탄압, 반공 탄압, 나치 협력 정책을 추진했어.
많은 사람들은 ‘나라가 망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했지만, 다른 선택을 한 사람도 있었어. 그중 한 명이 바로 샤를 드골이었지.
런던에서 울려 퍼진 드골의 목소리
샤를 드골은 당시 젊은 장군이었고, 독일과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던 소수파였어. 패배가 확정되자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망명 정부를 꾸리고, 1940년 6월 18일, BBC 라디오를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호소했지.
“프랑스는 전투에서 졌지만, 전쟁에서 진 것은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프랑스 전역에 울려 퍼졌고, '자유 프랑스(La France Libre)' 운동의 시작이 되었어. 이 방송은 나중에 프랑스인들에게 국가 재건의 상징적인 메시지가 되었지.
드골은 영국과 협력하며 전 세계 프랑스 식민지와 프랑스인들에게 저항의 불씨를 붙였고, 점점 영향력을 키워갔어.
프랑스 안의 저항, 그리고 희생
프랑스 내부에서도 그냥 당하고만 있진 않았어. 레지스탕스(Resistance)라고 불리는 지하 저항 조직들이 활동을 시작했지. 이들은 정보를 전달하고, 철도나 통신선을 파괴하고, 나치 협력자들을 처단하는 일을 했어. 하지만 걸리면 끔찍했지. 고문, 총살, 강제수용소. 저항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어.
일반 시민들도 몰래 전단지를 나르고, 유대인 가족을 숨겨주고, 독일군에 협력하길 거부하며 조용한 방식으로도 저항을 했어. 레지스탕스의 상징은 작은 자유의 행동이 모여 거대한 힘이 된다는 믿음이었지.
연합군과 함께 프랑스 해방을 향해
1944년, 전세가 바뀌면서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어. 노르망디 상륙 작전(D-Day)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었고, 드골은 연합군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왔지.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는 연합군과 함께 파리를 해방시켰고, 1944년 8월 25일, 파리 시민들이 다시 자유를 되찾게 됐어.
드골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일 점령기와 비시 정부의 잘못을 정리하기 시작했어. 그는 전후 프랑스를 다시 세우기 위한 중심 인물이 되었지.
점령의 고통과 저항의 자부심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와 점령, 분열이라는 가장 치욕적인 시간을 겪었어. 하지만 동시에, 레지스탕스와 드골의 등장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자존심과 희망을 되살려준 사건이기도 했지.
전쟁이 끝난 뒤, 비시 정부에 협력했던 인물들은 처벌을 받았고, 프랑스는 '공화국의 이름으로 다시 시작하자'는 결의를 다지게 돼. 드골은 전쟁 영웅이 되었고, 프랑스의 새로운 정치 체제를 만들기 위한 중심이 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