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2제정의 마지막은 너무 허무하게 끝났어. 보불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직접 포로가 되는 충격적인 패배를 겪으면서 말이야.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건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한 나라 전체가 뒤집히는 사건이었지. 바로 파리 코뮌, 역사상 가장 짧지만 강렬한 노동자 자치 정부의 실험이었어.
보불전쟁, 프랑스를 무너뜨린 전쟁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오늘날의 독일)이 전쟁을 시작했어. 겉으론 외교 문제였지만, 속으론 독일 통일을 추진하던 비스마르크와 그걸 막으려던 나폴레옹 3세의 계산이 충돌한 거였지. 그런데 프랑스는 준비가 전혀 안 돼 있었어.
전쟁 초반부터 프랑스군은 계속 밀렸고, 결정적으로 세당(Sedan)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 본인이 포로로 잡혀버렸어. 황제가 포로가 됐다는 건 그 자체로 정권의 붕괴를 뜻했지. 제2제정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끝났어.
파리 시민들은 곧바로 봉기했고, 황제를 쫓아낸 뒤 제3공화국을 수립했어. 문제는 전쟁은 끝난 게 아니었다는 거야. 프로이센군은 계속 진격했고, 파리는 포위당한 채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게 돼.
굴욕적인 강화 조약과 국민의 분노
결국 프랑스는 패전국으로서 비스마르크와 강화 협상을 하게 돼. 결과는 너무도 굴욕적이었어. 알자스-로렌 지역을 독일에 넘기고, 막대한 배상금까지 물게 된 거야. 국민들 사이에선 분노가 터졌지.
특히 파리 시민들은 이렇게 생각했어.
“우린 싸웠고, 버텼고, 심지어 혁명까지 했는데, 왜 이런 정부가 이런 조약을 맺어?”
그래서 점점 중앙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파리만의 새로운 정치 실험을 해보자는 분위기가 생겨나게 됐어.
파리 코뮌 – 노동자들이 만든 도시 정부
1871년 3월, 결국 파리 시민들이 또 한 번 무기를 들었어. 국가 방위군이 정부의 무기 반출을 막으면서 본격적인 봉기가 시작됐지. 그리곤 파리는 정부로부터 사실상 독립해서,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자치정부, 파리 코뮌을 선포하게 돼.
코뮌은 기존 정부와 완전히 다른 방향을 지향했어.
- 고위직도 일반 노동자 임금만 받도록 했고
- 교육은 세속적이고 무상으로 제공됐으며
-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고
-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했어
모든 것이 평등, 자치, 노동자 중심을 향해 있었던 거야. 물론 혼란도 있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코뮌은 하나의 새로운 체제를 실험한 거였지.
베르사유 정부의 반격 – 파리는 피로 물들었어
하지만 프랑스 중앙정부, 즉 제3공화국의 임시정부는 이 상황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어. 그들은 베르사유에 있던 병력을 이끌고 파리를 향해 진격했고, 마침내 5월 ‘피의 일주일’이 시작돼.
정부군은 무자비하게 파리 시민들을 진압했어. 바리케이드는 무너졌고, 거리마다 총격과 학살이 이어졌지. 체포된 사람들은 즉결처형당했고, 코뮌을 지지했던 수천 명이 죽었어. 파리의 공동묘지에는 코뮌을 지키다 죽은 사람들이 집단 매장됐지.
그렇게 해서 파리 코뮌은 72일 만에 무너졌어. 너무 짧았지만, 너무도 강렬한 시도였어.
짓밟힌 꿈, 하지만 꺼지지 않은 불씨
코뮌은 실패했지만, 그 의미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어. 이 사건은 세계 최초의 노동자 정부 실험으로 평가됐고, 이후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상징처럼 남게 돼. 마르크스조차 파리 코뮌을 보면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고 평가했을 정도였어.
그리고 파리 시민들의 저항은 이후 프랑스 민주주의 역사에서 잊히지 않는 불꽃으로 남게 돼. 지금도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가면, ‘코뮌 벽(Mur des Fédérés)’이 남아 있어. 거기엔 희생된 이들의 이름이 남겨져 있고, 사람들은 지금도 그 앞에 꽃을 놓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