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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이야기] 25. 부르봉 왕정 복고와 7월 혁명 – 왕의 귀환과 다시 쫓겨난 왕

by 지금이순간마법처럼 2025.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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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하고 유배되자, 유럽은 다시 예전 질서를 되돌려 놓으려 했어.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지. 왕정이 폐지된 지 벌써 20년이 넘었지만, 부르봉 왕가는 다시 왕좌에 오르게 돼. 하지만 문제는, 프랑스는 더 이상 예전의 프랑스가 아니었다는 거야. 그걸 끝내 깨닫지 못한 왕은 결국 또다시 쫓겨나게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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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떠난 자리에 부르봉 왕가가 돌아오다

1814년, 나폴레옹이 첫 번째로 퇴위하자 유럽 열강들은 프랑스에 루이 18세를 새로운 왕으로 세워. 그는 루이 16세의 동생이었고, 혁명 당시 망명해 있었던 인물이야. 그래서 프랑스 왕정은 ‘부르봉 왕정 복고’라는 이름으로 부활하게 되지.

루이 18세는 과거 왕권신수설처럼 절대권력을 주장하진 않았어. 오히려 국민의 눈치를 좀 봤지. 그래서 입헌군주제 헌법을 만들고, 일부 자유를 인정하는 ‘헌장’을 발표했어. 겉보기엔 왕정과 자유주의가 공존하는 체제처럼 보였지.

하지만 문제는 내부에 있었어. 귀족들과 옛 왕당파들은 여전히 혁명 전 체제로 돌아가고 싶어했어. 반면 시민들은 그걸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지. 갈등은 점점 커지고 있었어.

샤를 10세의 시대 – 시대착오적인 왕

1824년, 루이 18세가 죽고 왕위는 동생인 샤를 10세에게 넘어가. 그런데 이 샤를 10세는 형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고집스러운 왕이었어. 그는 프랑스를 마치 옛날 절대왕정처럼 다스리려고 했지.

가장 대표적인 게 1825년 배상법이었어. 이 법은 혁명 시기에 땅을 빼앗긴 귀족들에게 국가 돈으로 보상해주는 법이었지. 시민들 입장에선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어. 내가 낸 세금으로 귀족들 배를 불려준다고?

거기다 언론 탄압, 의회 해산, 선거권 축소 같은 조치도 이어졌어. 결국 사람들 사이에선 “이건 루이 14세 시대로 되돌아가는 거 아니야?” 하는 불만이 쌓여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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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폭발한 민심 – 1830년 7월 혁명

그리고 마침내, 1830년 7월, 샤를 10세는 결정적인 실수를 해. 7월 칙령이라고 해서, 신문 발행을 금지하고, 의회를 무시하고, 투표권까지 대폭 제한하는 명령을 내린 거야. 이건 완전히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어.

파리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고, 학생, 노동자, 인쇄공, 기자들까지 무기를 들고 봉기했지. 며칠간 시가전이 벌어졌고, 결국 왕궁까지 위협받게 되자 샤를 10세는 망명길에 오르게 돼. 다시 한 번 왕이 쫓겨나는 순간이었지.

이게 바로 1830년 7월 혁명, 그리고 두 번째 왕정 폐지야. 이제 프랑스는 다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돼.

왕은 쫓겨났지만, 공화국이 아닌 또 다른 왕이?

재밌는 건, 왕정이 무너졌다고 해서 곧바로 공화국이 된 건 아니었어. 7월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 중엔 과격한 공화주의자도 있었지만, 동시에 온건한 입헌군주제를 원하는 세력도 있었거든.

그래서 타협안으로 등장한 인물이 있었어. 바로 루이 필리프, 오를레앙 가문 출신의 왕자였지. 그는 스스로를 “국민의 왕”이라 불렀고, 의회 중심 정치를 약속했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7월 왕정이야.

표면적으로는 왕이 있었지만, 왕의 권한은 많이 줄어들었고, 부르주아 중심의 정치 체제로 흘러갔지. 하지만 이 체제도 오래가진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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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반복되는 역사 – 프랑스는 어디로 가야 했을까?

부르봉 왕정 복고는 혁명을 거치고도 여전히 과거를 붙잡으려 했던 세력의 마지막 발악이었어. 하지만 프랑스는 이미 변해 있었지. 시민계층은 성장했고, 자유에 대한 감각은 더 이상 지워지지 않았어.

7월 혁명은 단순한 왕교체가 아니었어. 프랑스 국민들이 직접 거리로 나서서 정치적 의사를 드러낸 사건이었고, 이후 유럽 곳곳에 퍼지는 자유주의 운동의 시발점이기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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