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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이야기] 19.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 목을 내놓은 왕과 왕비

by 지금이순간마법처럼 2025.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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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왕과 왕비가 공식적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된 사건, 이건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었어. 천 년 가까이 이어져온 왕정의 종말, 그리고 근대 민주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지. 그 중심엔 바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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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하지만 무능했던 왕” – 루이 16세

루이 16세는 원래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무뚝뚝하고 수줍은 성격이었지만, 사람들에게 피해 주는 걸 싫어하는 착한 왕이었지. 문제는… 너무 무능했고 결단력이 없었다는 거야.

그는 왕이 되자마자 이미 국가 재정이 엉망이란 걸 알았어. 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전쟁으로 돈을 펑펑 써놨거든. 세금을 더 걷어야 했지만,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세금 안 내고 버티는 중이었어. 왕이 나서서 개혁하려 했지만, 귀족들이 반대하면 바로 물러서버렸지.

“사치의 상징으로 몰린 왕비” –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황실 출신이었어. 정치적 동맹을 위해 프랑스로 시집왔지만, 국민들은 '외국인 왕비'를 썩 좋아하지 않았어. 거기다 당시 베르사유 궁전은 엄청 화려하고, 마리는 옷, 장신구, 파티에 돈을 펑펑 썼지.

그게 문제였어.
사실, 그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궁정 전체가 그랬는데, 마리만 딱 집어서 “저 여자가 나라 말아먹는다!”는 이미지가 퍼진 거야. 유명한 말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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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
이 말, 실제로 그녀가 했는진 확실하진 않지만, 그만큼 백성들과 단절된 상징으로 여겨졌다는 거야.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이었어

계속되는 흉작, 빵값 폭등, 실업, 세금 부담… 평민들은 점점 왕실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어. 그런데도 귀족들은 세금 안 내고, 궁전은 매일 연회에 파티니... 국민들이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

 

그래서 1789년, 삼부회(귀족·성직자·평민 회의)가 열렸고, 결국 국민의회가 탄생하면서 혁명의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어. 그 순간부터 루이 16세 부부는 점점 “국민의 왕”이 아닌 “적”으로 취급되기 시작했지.

도망치려다 잡힌 왕 – '바렌느 사건'

1791년, 루이 16세 가족은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려다 들키는 사건이 벌어져. 이게 바로 ‘바렌느 사건’이야. 왕이 도망쳤다가 국경 마을에서 들켜서 다시 파리로 끌려왔는데, 이건 국민에게 큰 배신감을 안겨줬어.

“왕이 우리를 버리려 했다고?”
이후 루이 16세는 더는 ‘개혁하려는 왕’이 아니라, “조국을 배신한 자” 낙인 찍혔어. 이 사건은 왕정 폐지 여론을 폭발시켰고, 공화정을 향한 길이 본격적으로 열렸지.

재판과 처형 – 단두대 앞의 왕과 왕비

1792년, 프랑스는 공화국을 선포했어. 그리고 루이 16세는 반역죄로 재판에 넘겨졌지. 국민공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왕을 처형하자”고 결정했어. 그리고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는 파리 콩코드 광장에 세워진 단두대 위에서 목이 잘렸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같은 해 10월, 같은 곳에서 처형당했어. 그녀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조용히 단두대로 걸어갔다고 전해져. 마지막으로 군중에게 “실례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두 사람의 죽음은 프랑스 왕정의 공식적인 끝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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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 – 프랑스는 어디로 가는 걸까?

왕과 왕비가 죽었다고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었어. 오히려 더 큰 혼란이 시작됐지. 급진파가 권력을 잡으면서 공포 정치가 시작되고, 나라 안은 또다시 피바다가 됐어. 루이 16세와 마리의 죽음은 어떤 면에서는 시대의 희생양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분명한 건, 이 부부의 최후가 프랑스를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거야. 왕은 더 이상 신의 대리인이 아니고, 국민이 권력의 주인이 된다는 생각이 퍼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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