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에서 앙리 4세(Henri IV)는
참 독특한 왕이었어.
원래 위그노였던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를 통합했잖아?
그 덕분에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종교 전쟁을
마침내 끝낼 수 있었지.
“파리는 하나의 미사만큼의 가치가 있다”
이 말, 진짜 유명하지.
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한 말로 알려져 있는데,
그만큼 그는 실용적 정치인이었어.
“왕으로서 프랑스를 다스리려면
한 종교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던 거지.
결국 그는 1598년에 낭트칙령(Édit de Nantes)을 발표해.
낭트칙령 – 피로 쌓인 평화의 약속
이 칙령은 단순한 종교 자유 선언이 아니었어.
프랑스 전역에서 위그노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고,
자기들만의 학교, 재판소, 요새도 갖게 해줬지.
물론, 수도인 파리 같은 주요 도시에서는
예배가 금지됐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위그노와 가톨릭이 공존할 수 있게 한
획기적인 정책이었어.
관용의 정치, 하지만...
앙리 4세는 종교적 관용뿐 아니라
경제 회복과 민생 안정에도 힘을 쏟았어.
그의 재상 쉴리(Sully)와 함께
농업을 장려하고 도로를 정비하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켰지.
“닭고기 수프를 모든 농부의 일요일 식탁에”
라는 말이 그가 꿈꾼 풍요로운 국가상이었어.
하지만 이런 왕도 오래 살지는 못했어.
1610년, 광신적인 가톨릭 신자에게 암살을 당하면서
그의 꿈은 아들 루이 13세에게로 이어지게 돼.
아버지의 유산, 아들의 고민
앙리 4세의 아들 루이 13세(Louis XIII)는
왕이 되긴 했지만
어릴 때 즉위했기 때문에 처음엔 모후인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했어.
그리고 바로 이때
한 인물이 역사의 중심에 등장해.
바로 리슐리외(Richelieu) 추기경이지.
리슐리외는 단순한 종교인이 아니었어.
그는 말 그대로 프랑스를 ‘절대왕정’의 길로 밀어붙인 설계자였지.
이제 곧 프랑스는 진짜 ‘왕의 나라’로 변화하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