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술레이만이 죽고 나자,
오스만 제국은 조금씩 느리게,
하지만 분명하게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돼.
오스만 제국의 가장 눈부신 순간
뒤에 따라온 서서히 어두워지는 시기,
즉 오스만 제국의 쇠퇴기 이야기야.
이건 갑자기 무너진 게 아니야.
몇 세기에 걸쳐 천천히,
하지만 분명히 내부와 외부에서
균열이 생기고, 그게 결국엔
제국 전체를 무너뜨리게 되었어.
그럼 지금부터,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오스만 제국이 어떻게 흔들리기
시작했는지 함께 볼게.
정치는 흐려지고, 제국은 점점 부서져 간다
전성기 이후, 흔들리기 시작한 권력의 중심
술레이만 대제가 죽고 나자,
후계자였던 셀림 2세부터는
전쟁터보다 하렘 안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던 황제들이 많아졌어.
왕위는 계속 세습됐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점점 궁전 안의 내관,
후궁, 대재상(총리격) 등
비공식 권력자들 손으로 넘어갔지.
이 시기를 종종 ‘하렘 정치의 시대’라고 불러.
정치는 약해지고, 부패는 퍼지기 시작했어.
행정도 혼란, 군대도 무력화
오스만의 자랑이던 예니체리(엘리트 보병부대)는
처음엔 굉장히 강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하고, 정치화되었어.
더 이상 훈련도 하지 않고,
개혁하려는 술탄이 나타나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
결국 예니체리는 군사적 자산이 아니라
정치적 독(毒)이 되었어.
지방에서도 총독들이 독자적으로
세금을 거두고,
중앙 정부에 잘 협조하지 않았어.
제국은 밖은 넓었지만,
중심은 느슨해지고 있었던 거야.
유럽은 변하고 있었는데, 오스만은 그대로였다
17세기 이후,
유럽은 르네상스, 과학 혁명,
산업 혁명을 거치며
새로운 무기와 경제 체제를 갖추고 있었어.
하지만 오스만은 여전히 중세식 행정 체제,
구식 무기, 종교 중심의 교육에
머무르고 있었지.
유럽과의 기술 격차는 점점 벌어졌고,
그 결과 전쟁에서 계속 밀리기 시작해.
치명적인 패배 – 비엔나 전투와 카를로비츠 조약
1683년, 오스만 제국은 두 번째로
오스트리아 빈을 공격했어.
하지만 이번엔 실패했고,
유럽 동맹군에게 대패를 당하지.
그 결과,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은 처음으로 정식으로
영토를 내주게 돼.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등 유럽 영토를 잃었고,
'정복하는 제국에서,
지키기 바쁜 제국'으로 바뀌었지.
내부에서도 민족 갈등이 점점 커지다
오스만 제국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어우러져 살았던 다민족 제국이었어.
처음엔 이들을 ‘밀레트 체제(자치 공동체)’로
잘 다스렸지만, 시대가 지나며 민족주의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지.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같은 발칸 민족들은
자치가 아니라 독립을 요구하게 되었고,
유럽 열강은 이들에게 몰래 무기와 돈을 지원하며
제국을 흔들었어.
내부는 분열되고, 외부는 압박했고,
오스만은 점점 ‘병든 제국(Sick Man of Europe)’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돼.
개혁은 있었지만, 늦었고 부족했다
19세기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탄지마트(Tanzimat)라는 개혁도 시도했어.
- 법 체계 정비,
- 세금 개혁,
- 군대와 교육 개혁 등
하지만 이미 권력은 약해졌고,
부패는 깊이 퍼져 있었고,
외세의 간섭도 심해져 있었기 때문에
개혁은 본질을 바꾸기엔 너무 늦었어.
이처럼오스만 제국의 쇠퇴는
어느 한 순간 무너진 게 아니야.
수백 년에 걸쳐 내부의 부패,
변화에 대한 둔감함, 민족 갈등,
유럽 열강의 압박이 겹쳐서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제국의
뿌리를 흔들어왔던 거지.
하지만 이 모든 쇠퇴 속에서도
오스만은 여전히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제국의 기억과 자존심을 품고 있었어.
그리고 그 마지막 불꽃은
1차 세계대전과 함께 터지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