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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이야기-마지막] 입헌군주제와 격동의 정치 – 혼란 속 새로운 질서를 찾아서

by 지금이순간마법처럼 2025.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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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태국은 라마 5세의 개혁으로
근대 국가의 뼈대를 갖춘 나라가 되었고,
이제는 왕 중심에서 점점 국민 중심의 정치로

바뀌는 과정을 겪게 돼.

 

하지만 그 변화는 순조롭지 않았고,
20세기 초반부터 태국은
입헌군주제 도입, 군부 등장,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을 지나게 돼.

 

 

1932년, 쿠데타로 왕권이 줄어들다

오랜 시간 동안 태국은
절대군주제, 즉 왕이 모든 걸 결정하는 나라였어.

하지만 1932년,

젊은 관료들과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무혈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에게 입헌군주제(Constitutional Monarchy)를

받아들이게 해.

 

그 결과, 입헌군주국으로 전환,

즉 왕은 상징적 존재가 되고,
정치는 국회와 정부가 맡게 되는 구조가 시작된 거야.

 

이걸 흔히 '시암 혁명(1932 Revolution)'이라고 불러.

‘시암’에서 ‘태국’으로

1939년, 당시 총리였던

' 쁘리디 파놈용(Pridi Phanomyong)'과
후계자인 '쁠랙 피분송크람(Phibun Songkhram)' 정권

아래서 나라 이름을 '시암(Siam)'에서
지금의 '태국(Thailand)'으로 바꾸게 돼.

 

‘타이’라는 말은 ‘자유’라는 뜻이 있어.


즉, 자유를 사랑하는 타이 민족의 나라라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지.

 

제2차 세계대전, 일본과의 동맹

1940년대 초, 태국은 일본과 손을 잡게 돼.


그 배경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의

국경 분쟁이 있었고,
태국은 일본의 지원을 받으며

영토 일부를 되찾게 돼.

 

그러나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고,

전면전에 들어가자,
태국도 연합국의 적국이 되고 말아.

 

하지만 쁘리디 파놈용 같은 지도자들은
몰래 반일 조직(Seri Thai, 자유 태국 운동)을

운영하며 연합국과도 비밀리에 협력하고 있었어.

 

전쟁이 끝난 뒤, 이러한 움직임 덕분에 태국은
전범국이 되는 걸 피하고,

국제사회에서 입지를 유지할 수 있었지.

전쟁 이후에도 계속된 정치 혼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태국의 정치는 쉽게 안정되지 않았어.

 

군부 쿠데타가 반복되고,

총리와 국왕의 관계,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의

줄다리기가 계속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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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군부가 실권을 잡았고,
왕은 상징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었지만,
국민들 사이에선 점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커져갔어.

그래도 왕실은 여전히 중심이었다

특히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Bhumibol Adulyadej)'은
무려 70년 가까이 재위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있을 때마다
중재자 역할, 혹은 도덕적 지주 역할을 했어.

 

그 덕분에 왕실은
비록 정치에 개입하진 않아도
국민에게 정서적 중심으로 자리 잡게 돼.

태국, 민주주의를 향한 느리지만 꾸준한 걸음

태국은 지금까지도
군부의 영향력과 민주주의 사이에서
여러 번의 굴곡을 겪어왔지만,
조금씩 국민들의 정치적 의식은 성장해 왔어.

1970~80년대엔 학생 운동과 민주화 시위,

1992년엔 ‘검은 5월 사건’으로 불리는 대규모 시위,

그리고 2000년대 이후로는
선거, 쿠데타, 시민 저항이 반복되면서도
계속해서 더 나은 정치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시도는 멈추지 않고 있어.

 

검은 5월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o.wikipedia.org

출처 위키디피아

 

이 시기의 핵심은?

 

태국은 군주제가 입헌군주제로 바뀌고,

식민 지배를 피한 유일한 동남아 국가로서
외교적 균형을 잘 유지해 왔고,

세계대전, 냉전, 민주화 흐름 속에서도
자국의 길을 찾아 꾸준히 걸어왔다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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