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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이야기] 아유타야 왕국 – 무역과 전쟁으로 커진 동남아의 제국

by 지금이순간마법처럼 2025.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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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태국 역사에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간 왕국,
바로 아유타야 왕국(Ayutthaya) 이야기로

넘어가 볼게.

 

수코타이가 타이족의 자주성과 문화의

기초를 다진 나라였다면,
아유타야는 그것을 바탕으로 동남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나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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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타야 왕국의 등장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1351년, 지금의 차오프라야 강 유역에
한 왕이 새 왕국을 세워.
그가 바로 우통 왕(Uthong),

 

Uthong - Wikipedia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King of Siam from 1350 to 1369 King U-thong[2][a][3] (Thai: พระเจ้าอู่ทอง; pronounced [ʔùː.tʰɔ̄ːŋ]) or King Ramathibodi I (Thai: สมเด็จพระรามาธิบดี

en.wikipedia.org

출처 위키디피아


그리고 이 왕이 세운 나라가 바로

아유타야 왕국이야.

이 왕국의 이름은 인도 라마야나 서사시의

‘아요디야(Ayodhya)’에서 따온 건데,
불교와 힌두 문화의 영향을 함께 받은 이름이지.

아유타야는 지리적으로 강과 바다가 만나는 중요한 교통 요지에 있어서
처음부터 국제 무역과 외교에 능한 나라로 성장했어.

수코타이보다 더 강력하고, 더 국제적인 나라

아유타야는 초기에는 수코타이와 공존했지만,
점점 더 강력해지면서 수코타이를 흡수하고
이후 태국 중부, 북부, 심지어 캄보디아까지 영향력을 뻗쳐.

출처 나무위키 캡쳐

 

무엇보다 이 왕국은
동서양을 넘나드는 무역의 중심지였어.

중국, 일본, 인도는 물론이고

페르시아,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 상인들까지
아유타야에 항구를 열고 무역을 하러 왔지.

 

당시 유럽인들은 아유타야를
'동양의 베네치아'라고 부를 정도로 화려하고 개방적인 도시로 여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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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은 더 세지고, 사회는 더 복잡해졌어

아유타야 왕들은
‘신(神)의 화신’ 같은 존재로 여겨졌어.
수코타이 시대처럼 왕이 ‘백성의 아버지’라는 느낌보다는,
훨씬 더 권위 있고 절대적인 존재였지.

 

왕실은 복잡한 궁중 의례와 규칙을 통해
왕권을 신성화하고 위계질서를 더 확고히 했어.

그만큼 사회도 점점
신분제와 법률 중심의 체계로 변화해갔고,
태국식 왕정의 전통이 이때 확립됐다고 볼 수 있어.

종교는 여전히 중심에 있었어

아유타야는 수코타이보다 훨씬 크고 복잡한

나라였지만, 불교는 여전히 중심 사상이었어.


국가가 사원을 짓고, 승려를 지원하며,
불교를 통해 백성과 왕실을 하나로 묶었지.

 

특히 왕은 항상 불교 교리를 따라

다스리는 존재로 여겨졌고,
이게 왕의 정통성을 뒷받침해줬어.

외국과의 접촉, 그리고 기술과 문화의 융합

아유타야는 정말 개방적인 나라였어.

 

유럽의 포르투갈은 군사 기술과 화기를,

페르시아 상인들은 이슬람 문화와 문물을,

중국과 일본은 자기 나라의 물자와 문화를 가져왔지.

 

그래서 이 시기 아유타야는
태국, 크메르, 인도, 중국, 유럽이 혼합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어.


건축, 복식, 언어, 무기, 음식까지도 다 섞여 있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있었어

아유타야는 400년 넘게 번영했지만
내부 권력 다툼, 계속된 왕위 쟁탈전,
그리고 버마(미얀마)의 위협이 점점 커졌어.

 

결국 1767년,
버마의 콘바웅 왕조(Konbaung)가
대대적으로 침공해오고,
수도 아유타야는 완전히 불타고 폐허가 돼.

그날 이후로
아유타야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돼.

아유타야가 남긴 건 무엇일까?

 

국제성과 문화 융합의 힘,

강력한 왕권과 행정 제도,

불교와 국가의 결합,

그리고 외세에 대한 경험과 교훈.

 

이 모든 게
지금의 태국을 만든 핵심 뿌리가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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