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의 충격 이후
청나라가 겪게 된 내부 붕괴,
그리고 외부 압박의 이중고 이야기,
그리고 그 와중에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과
뒤늦은 대응인 양무운동 이야기를 하려고 해.
1842년 아편전쟁이 끝난 뒤,
청나라는 표면적으로는 평화를 되찾은 듯했지만
그건 진짜 지옥의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 것뿐이었어.
치욕적인 난징조약, 무너진 국방,
자신감 잃은 백성들, 거기에 계속되는
세금 착취와 부패, 이런 것들이 서서히
바닥에서부터 불처럼 번지기 시작했지.
태평천국 – 한 남자가 세운 '하늘의 나라'
1851년, 광시성(廣西省)이라는 지역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해.
“한 사람이 스스로를 예수의 동생이라 부르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나섰다더라.”
그 사람이 바로 '홍수전(洪秀全)'이야.
그는 기독교 성경을 독자적으로 해석해서
“나는 천국의 왕이고, 지금의 청나라는
악의 나라다” 라고 외쳤어.
그리고 가난한 농민들, 실업자, 소수민족들이
그의 말에 희망을 걸고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지.
반란이 아니라 ‘또 다른 나라’였다
태평천국의 세력은
단순한 ‘반란군’ 수준이 아니었어.
그들은 수도를 '난징'으로 정하고,
왕과 신하를 두고, 법과 제도를 만들고,
심지어 여성과 남성의 평등,
토지 균등 분배 같은
지금 봐도 진보적인 정책들을 실행했어.
당시 청나라 백성 입장에선
'청' 조정보다 훨씬 더 '공정한 나라'로 느껴졌지.
청나라는 스스로 진압도 못 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야.
태평천국은 순식간에
중국 남부 절반 이상을 장악했어.
청나라 군대는 여전히 무기력했고,
지휘 체계는 엉망, 전쟁은 오래 끌수록
백성들만 더 고통스러웠지.
결국 청 조정은 민간 세력에 도움을 청하게 돼.
그 중 하나가 ‘증국번’이 이끈
향용군(湘軍, 지방 자위 군대)이었고,
그가 중심이 되어 태평천국을 차례차례 무너뜨렸어.
하지만 전쟁은 14년이나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20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희생됐어.
중국 역사상 가장 참혹한 내전 중 하나야.
반란은 끝났지만, 무너진 건 권위였다
태평천국의 난은 청나라가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걸 증명한 사건이었어.
중앙 정부는 무기력했고,
진압은 지방의 사병(향용군)에게 맡겼고,
그 결과 중앙 권력은 약해지고,
지역 군벌들이 힘을 키우게 돼.
한마디로 제국이 조용히
갈라지고 있던 순간이었어.
늦었지만 뭔가 해야 했던 조정 – 양무운동의 시작
이제 조정도 느끼게 됐지.
"이 상태로 가면 진짜 나라가 무너진다."
그래서 1860년대부터
“서양 기술을 받아들여 군대와 산업을 키우자”는
움직임이 시작돼.
이게 바로 양무운동(洋務運動)이야.
양무운동 – 기술은 배웠지만, 정신은 그대로
양무운동의 핵심은 이거였어.
- 서양식 무기 만들기
- 근대 해군 창설
- 철도, 전신망 설치
- 공장 설립, 광산 개발
겉보기엔 꽤 진보적이었지.
실제로 한동안 청나라 해군도 아시아에서 손꼽혔어.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본질에 있었어.
관리들은 부패했고, 관료주의는 심각했고,
정치 체계는 하나도 안 바뀌었어.
‘총과 기차는 배웠지만, 그걸 쓸 사람과
제도는 옛날 그대로’였던 거야.
제국의 심장은 계속 약해져 갔다
양무운동은 청나라가 살아나기 위한
마지막 버둥거림이었어.
하지만 그건 마치, 구멍 난 배에
물을 퍼내면서 도자기로 막는 일 같았지.
서구 열강은 더 많은 것을 요구했고,
내부에서는 또 다른 반란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어.
그리고 동쪽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나라,
일본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