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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야기] 궁궐의 문 뒤에서 나라를 움직인 여자 – 서태후의 등장

by 지금이순간마법처럼 2025.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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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후궁, 하지만 눈빛이 달랐다

청나라는 서태후를 빼 놓을 수가 없어.

 

서태후의 본명은 '예허나라 씨(葉赫那拉氏)'야.
만주족 귀족 가문 출신이긴 했지만,

그렇게 대단한 배경은 아니었어.


그녀는 16살에 황궁에 들어와

함풍제(咸豐帝)의 후궁 중 하나가 됐지.


그 당시 그녀의 공식 호칭은

‘귀인’, 높은 편은 아니었어.

 

하지만 서태후는 눈치, 기억력,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도 야망이 있었어.

 

그녀는 황제의 성격, 궁중의 권력 구도,
다른 후궁들 사이의 갈등을 빠르게 파악했고,
아무도 관심 안 두던 틈새에서

조용히 영향력을 넓혀갔어.

황제를 낳은 여자, ‘어머니’가 되다

서태후가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순간은
함풍제의 아들을 낳은 것이었어.

 

그 아이가 바로 나중에 황제가 되는

'동치제(同治帝)'야.
궁궐에서 황자의 어머니가 된다는 건

곧 권력의 문을 연다는 뜻이야.


이제 그녀는 단순한 후궁이 아니라
황실의 계승자 ‘어머니’로서 자리 잡게 됐지.

 

함풍제는 병약했고, 점점 병이 깊어졌어.
그러다 1861년, 북경을 떠나

열하(熱河)에서 병사하게 돼.

이때가 바로 서태후가 권력으로 들어서는

결정적 순간이었지.

1861년, 9살짜리 황제와 궁중 쿠데타

함풍제가 죽으면서
그의 아들(서태후의 아들) 동치제가

6세에 황제가 돼.


근데 문제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거야.
그래서 함풍제는 유언으로

'팔대신(八大臣)'이라는 대신들에게
섭정을 맡기게 해.

 

하지만 서태후는 가만히 있지 않았어.
그녀는 함풍제의 또 다른 황후였던

‘자안태후’와 손을 잡고

한 명의 인물을 끌어들여.


바로 함풍제의 동생,

‘공친왕’ 익신(奕訢)이야.

 

셋은 몰래 계획을 세우고
황제가 북경으로 돌아오는 날,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팔대신을 체포하고 정권을 접수해버린 거야.


이 사건을 ‘신유정변(辛酉政變)’이라고 불러.

 

그렇게 서태후는 아들의 이름으로

정치를 하기 시작하고,
‘동치제 어머니’라는 이유로

국정을 관장하는 여인이 돼.

정치를 배운 후궁은 더 이상 후궁이 아니었다

처음엔 ‘아들을 대신해 정치하는 어머니’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점점 실권자가 되었어.


상소문을 열어보는 권리, 인사 결정,

정책 승인의 최종 판단권
모두 서태후가 갖게 됐지.

 

그리고 아들이 성장하자, 그는

어머니의 간섭을 벗어나려 했지만
동치제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어.

다시 한 번 황제를 선택하다 – 권력을 놓지 않은 서태후

이제 황제가 죽었고 후계자가 필요했어.
그때 서태후는 또다시 역사적인 결정을 내려.

 

자신의 조카이자,

당시 4살이었던 '광서제(光緒帝)'를
새로운 황제로 즉위시키고,

다시 섭정을 시작한 거야.

 

즉, 두 명의 어린 황제를 통해

청나라를 사실상 지배한 여인이 된 거지.

그녀는 어떻게 권력을 유지했을까?

서태후는 단순한 독재자가 아니었어.
그녀는 정치 감각, 사람 보는 눈,

정보 파악 능력이 대단했어.

 

반대파는 조용히 제거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앉히고,

개혁은 필요할 땐 허용하고,

위협되면 차단했어.

대표적으로, 광서제가

'변법자강 운동'을 시도하자
그걸 쿠데타로 뒤집고

광서제를 유폐시키기도 해.

한 나라의 황제 위에 있었던 여자

서태후는 왕후도,

정식 황후도 아니었어.


하지만 그녀는 황제를 만들어냈고,

다뤘고, 대신했고, 그렇게 청나라의

운명을 40년 넘게 좌지우지했어.

 

그녀의 통치는
청나라를 살린 것도 있지만,
청나라를 멈추게 한 원인이기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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