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일본이 ‘기회’를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야.
바로 중국의 산둥반도(山東半島)를
일본이 차지하게 된 과정이야.
원래 산둥반도는 독일 제국이 1898년부터
칭다오(青島, 청도)를 중심으로 다스리고 있었어.
독일은 이곳에 군항을 만들고 철도와 맥주 공장을
세우는 등 영향력을 키우고 있었지.
그런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터졌어.
독일이 바쁘게 전쟁하느라 다른 곳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때였지.
일본은 이걸 놓치지 않았어.
“우리는 영국과 동맹이다. 독일이 아시아에
가지고 있던 조차지(빌려 통치함)를 우리가
대신 관리하겠다”는 명분으로 움직였지.
그리고는 영국과 함께 칭다오를 공격해서
독일 세력을 몰아냈어.
이게 바로 ‘산둥 점령’ 사건이야.
이 과정에서 일본은 중국과 상의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움직였고,
결국 1915년엔 ‘21개조 요구’라는 걸 중국에 들이밀어.
이 요구안은 거의 반강제적인
식민지 조약이나 마찬가지였지.
“산둥반도는 일본이 가지겠다”, “중국 안의 철도,
광산, 항구의 권리를 일본이 가져야 한다”
같은 조항들이 있었어.
중국은 이걸 울며 겨자 먹기로 일부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중국 민심은 엄청나게 들끓었어.
그리고 이 사건은 훗날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서
또 한 번 문제가 됐어.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들이 모여
영토 문제를 정리할 때, 일본은 “우리가 독일한테서
빼앗은 산둥을 우리 땅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고, 이게 받아들여져 버린 거야.
이 결정에 분노한 중국인들은
거리로 나와서 항의했지.
그게 바로 유명한 ‘5·4 운동’이야.
젊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중심이 돼서
반일감정과 민족주의, 그리고
반제국주의 운동으로 번졌지.
결국 산둥반도 점령은 일본이 어떻게 제국주의적인
기회를 노리고 행동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야.
겉으로는 ‘전쟁 중 독일의 위협 제거’였지만,
실제로는 “기회주의적인 영토 확장”이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