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이후, 일본은 조선을 총칼로만 다스리던 무단통치를
좀 더 부드러운 포장으로 바꾸는 문화통치를 시도했지.
그런데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인을 아예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동화정책’으로 점점 본색을 드러내게 돼.
그 중심에 있었던 말이 바로
‘내선일체(內鮮一體)’였어.
내선일체 – 조선과 일본은 하나다?
이 말은 겉보기엔 ‘같은 나라, 하나의 국민’ 같지만
실상은 “조선인은 일본인에게 동화되어야 한다”는 말이었어.
‘같이 간다’는 말은 결국 ‘일본에 맞춰 따라오라’는 뜻이었지.
그래서 조선인에게 ‘황국신민’,
즉 천황의 충성스러운 백성이 되라는 교육이 시작됐어.
학교에서는 매일 아침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게 했어
“나는 황국신민으로서 충성하고 의무를 다하며...”
이런 식의 맹세를 아침마다 강제로 암송시켰지.
아이들은 천황에게 충성하는 게 당연한 듯
세뇌를 당하고 있었어.
이건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정체성 말살에 가까운 정책이었어.

조선어는 사라지고, 일본어만 남기려 했어
학교에서 조선어 수업은 점점 줄어들고,
결국엔 조선어는 선택과목으로 전락했어.
반면 일본어는 필수,
심지어 일상에서 일본어를 쓰지 않으면
무시당하거나 벌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
조선어를 쓰는 게 죄스러운 일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어.
‘내선결혼’도 장려됐어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도 적극 권장했어.
“내선일체가 진짜 이뤄지려면 피까지 섞여야지”
라는 식의 논리였지.
하지만 현실은 달랐어.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여전히 차별했고,
이런 결혼은 거의 없었고, 있어도 억압적인 경우가 많았지.
결국 황국신민화는 ‘일본인처럼 살아라’는 말이었어
음식, 말, 복장, 사상, 역사까지
모두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요구였고,
조선인의 고유한 문화와 정신은 점점 사라져 갔어.
이 시기 조선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조차
갖기 힘든 상황에 처했어.
결론적으로 말하면…
‘내선일체’는 평등한 통합이 아니라
일방적인 일본화 강요였어.
그리고 이 정책은
다음 단계인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로 이어지게 돼.
이건 단순한 문화정책이 아니라
민족 말살 프로젝트의 핵심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