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이후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어.
“이제 무조건 억누른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그걸 깨닫게 된 거지.
그래서 일본은 전략을 바꿨어.
겉으로는 ‘관용’을, 속으로는 ‘동화’를 내세우는
새로운 방식의 통치를 시도하게 돼.
이걸 ‘문화통치(文化統治)’라고 불러.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의 전환
그전까지는 헌병이 지배하던 시기였어.
총칼 들고 거리 순찰하던 시절 말이야.
하지만 3·1운동 이후, 일본은
겉으로는 조선을 "문명화"하고 "선진화"시키겠다며
좀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통치하는 척 했지.
그래서 총독부 헌병 중심에서 보통 경찰 중심 체제로 바꾸고,
신문·잡지도 허가제로 허용했어.
학교도 늘어나고, 교육 기회도 더 주는 것처럼 보였어.
언론, 출판, 교육의 ‘허용’ – 하지만 조건부였지
신문? 허용했어.
하지만 일본에 비판적인 기사는 여전히 금지.
학교? 많이 세웠지.
하지만 일본어 위주,
조선 역사 교육은 없고,
조선어는 ‘부록’ 취급.
조선 학생들에겐
“너희는 일본의 신민(臣民)이다”
라는 교육이 반복됐어.
조선인의 참여 확대? 눈속임이었지
조선인도 관리가 될 수 있다고 했지만
높은 자리는 여전히 일본인이 독점.
조선인에게는 허울뿐인 참여 기회였어.
심지어 ‘자치’ 이야기도 나왔지만,
그건 말뿐이었고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이미지 정치
일본은 이 시기에 조선의 문화를 연구하고,
고궁 복원이나 문화재 정리도 했어.
겉으론 ‘조선 문화를 존중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조선은 미개했고, 일본이 근대화시켰다”
이런 논리를 만들기 위한 도구였던 거야.
조선총독부 건물도
이때 대대적으로 건설돼서
경복궁 정문을 가리듯 우뚝 세워졌지.
그것도 하나의 지배의 상징이었어.
이 시기의 본질 – 부드러운 얼굴 뒤의 강압
문화통치는 이름만 ‘문화’였을 뿐,
사실은 조선인을 일본화시키기 위한 동화 정책이었어.
일본식 이름, 일본식 언어,
그리고 ‘천황에 충성하라’는 교육이
조선 사회 전반에 스며들기 시작했지.
그리고 이 흐름은
다음 단계인 ‘내선일체’로 이어지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