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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민지] 26.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 민중의 저항

by 지금이순간마법처럼 2025.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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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낭독된 한 편의 선언문이
전국을 뒤흔드는 불씨가 되었어.

 

그게 바로 ‘독립선언서’,
그리고 이 선언을 알리기 위해
수많은 학생들과 민중들이 모인
3·1운동(삼일운동)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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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조용하지만 강력했던 시작

이 운동은 처음엔 비폭력·평화적인 시위로 시작됐어.


33명의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젊은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다”라고 외쳤지.

 

사람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왔어.

전국으로 퍼진 독립의 물결

그 시위는 하루 이틀로 끝나지 않았어.


서울뿐만 아니라 평양, 대구, 광주, 원산, 진주…
전국 1,500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고,
200만 명 이상이 참가한
조선 최대 규모의 민중운동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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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농민, 상인, 심지어 아이들과 여성들까지
계층과 나이 불문하고 모두 거리로 나섰어.

 

일본의 잔인한 진압

하지만 일본은 이 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고, 체포하고, 고문하고, 학살했지.


특히 제암리 학살사건처럼
교회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불태우거나
총으로 쏘는 일이 벌어졌어.

 

공식 통계로만도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이 체포·고문당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씨는 살아있었지

3·1운동은 실패가 아니었어.


그날 외쳐진 “독립 만세!”의 함성은
조선 민중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고,
세계 언론도 이를 주목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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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운동은 조선이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었고,
자주 독립을 위한 정치조직,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어.

 

상하이에 세워진 임시정부 – 망명정부의 시작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조선의 지식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어.


이는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세운
공식적인 ‘민주 공화정 체제’였고,
대한독립을 목표로 한 정부였지.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
그리고 후에는 김구를 중심으로
무장 독립투쟁도 이어가게 돼.

 

조직적 저항의 시발점

임시정부는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외교 활동을 벌이고,
국내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했어.

 

비록 조선 땅 안에 있진 않았지만,
조선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부로 인정받았고,
이후 광복군과 연결돼
항일 무장투쟁의 구심점이 되었어.

 

무단통치의 종말, 문화통치의 시작

3·1운동의 충격은
일본에도 컸어.

 

이제 더는 철권통치로는 조선을 다스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일본은
표면적으로는 부드러운 통치로 전환하는데,
그게 바로 다음 이야기인
‘문화통치기(1920~30년대 초)’야.

 

겉으론 자유와 관용을 말했지만,
속은 여전히 식민주의였던 이 시기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에서 설명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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