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이후 네덜란드가
식민지 체제를 더 단단히 다지기 위해 도입한 정책,
바로 강제 재배 제도(Cultuurstelsel) 이야기를 해볼 거야.
인도네시아 식민지 역사에서
가장 무거우면서도 중요한 장면으로 들어갈 차례야.
바로 강제 재배 제도(Cultuurstelsel) 이야기야.
이건 단순히 농사를 짓게 한 게 아니야.
땅, 노동, 삶, 심지어 인간의 존엄까지
모두 식민지 수탈의 도구로 만들어버린
제도적 착취의 완성판이었어.
자바 전쟁(1825~1830) 이후,
네덜란드는 전쟁으로 큰 손실을 입고
식민지 운영이 흔들리기 시작했어.
이대로 가다간 동인도 식민지 다 잃겠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네덜란드는 수익을 확실하게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지.
그 결과 나온 게 바로
강제 재배 제도(Cultuurstelsel, 1830년 시행)야.
이 제도의 핵심은 딱 하나야.
“네덜란드 본국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인도네시아 백성들이 농사를 대신 지어라.”
어떻게? 아주 체계적이고 냉정하게 이렇게 했어.
모든 마을에 쿼터(할당량)를 주고, 쌀 대신 수출용
작물(설탕, 커피, 차, 고무, 인디고 등)을 심게 하고,
전체 경작지의 최소 20%를 반드시 네덜란드 정부에
제공하게 했지.
심지어 노동력도 무상, 물과 비료도 자비,
수확물은 헐값에 납부, 할당량 못 채우면 벌금.
말 그대로 “네가 가진 땅과 시간과 몸은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다”였던 거야.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어.
농민들은 쌀농사 짓지 못해서 기근이 닥치고,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수천 명이 아사했고,
병들고, 도망치고, 저항하려다 체벌과 구금당했지.
자바섬 중부의 어느 마을은 강제 커피 재배로 인해
수확 실패 때마다 마을 전체가 빚더미에 앉았고,
그 빚은 세대를 넘어 자식에게도 이어졌다고 해.
한편, 네덜란드는? 이 제도를 통해 수출 수익을
수백 배로 늘렸고, 국내의 철도, 항만, 운하,
은행 시스템을 이 돈으로 구축했어.
당시 유럽에선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돈줄”
이라는 말까지 돌았고, 이게 지금도
“자바는 네덜란드를 먹여 살렸다”는 표현으로 남아있지.
하지만 이런 착취가 아무 반발 없이 계속된 건 아니야.
현지 농민들의 소규모 반란, 일부 마을 지도자들의
거부 운동, 그리고 무엇보다 유럽 내부 양심 있는
지식인들의 비판이 커지게 돼.
특히 에두아르드 다우스 데커
(Eduard Douwes Dekker, 1820-1887) 라는
네덜란드 관리가 자신이 본 현실을 바탕으로 쓴 소설
《막사 하벨라르(Multatuli)》는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줬고, “강제 재배는 부끄러운 제도”라는
여론을 형성하게 돼.
결국 1870년, 강제 재배 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돼.
하지만 그 후에도 현지 농민과 땅을 착취하는 방식은
형태만 바꿔 계속 이어졌지.
그 속에서 ‘우리는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지?’라는
자각과 저항의 씨앗이 천천히 움트기 시작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