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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이야기] 31. 욤키푸르 전쟁(1973) – 아랍 국가들의 반격

by 지금이순간마법처럼 2025.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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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 이집트와 시리아의 복수의 칼날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엄청난 영토를 차지했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어.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고,

특히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시리아는 골란 고원을 되찾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지.
그리고 마침내 1973년, 그 반격의 날이 찾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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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0월 6일, 유대교에서 가장 신성한 날로 여겨지는

‘욤키푸르(Yom Kippur)’, 곧 속죄일이었어.
이스라엘 군대 대부분이 휴가를 떠난 상태였고,

전선은 비교적 느슨하게 유지되고 있었지.
바로 그날, 이집트와 시리아가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어.


이스라엘의 방어선을 뚫기 위한 치밀한 계획이었던 거지.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를 건너 시나이 반도로 진격,

시리아군은 골란 고원을 향해 대대적인 공격을 퍼부었어.
기습 효과는 대단했고, 이스라엘은 초반에 완전히 밀리는 상황이었지.

 

2. 전세 역전 – ‘디펜더’에서 다시 ‘어택커’로

이스라엘은 완전히 허를 찔린 상황이었지만,

빠르게 반격을 준비했어.
전 국민이 동원되고, 예비군이 속속 전장으로 복귀했지.


초반엔 혼란과 패닉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군 특유의 기동전과 공군력이 살아나기 시작했어.

특히 골란 고원 전선에서는 초기에 시리아군이 깊숙이 진입했지만,

이스라엘군은 치열한 방어 끝에 전선을 회복했고,

오히려 시리아 국경 가까이까지 반격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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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는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를

도하해 이집트 본토까지 위협하는 상황까지 갔지.

그야말로 ‘뒤집기’의 교과서 같은 전쟁이었어.
하지만 이 승리는 1967년과는 달랐어.


이스라엘은 엄청난 피해와 병력 손실,

그리고 국민들의 불신을 안게 되었거든.

 

3. 미국과 소련, 중동에 개입하다 – 세계가 흔들린 전쟁

욤키푸르 전쟁은 단순히 중동 지역의 문제가 아니었어.
냉전의 한가운데였던 당시, 이스라엘은 미국,

이집트와 시리아는 소련의 무기 지원을 받았고,
전쟁이 격화되자 양 진영 모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돼.

 

미국은 이스라엘을 위해 **‘니클 케이지 작전(Operation Nickel Grass)’**을 실시했어.
거대한 수송기를 통해 탱크, 전투기, 포탄, 식량까지 물자 수송이 이어졌지.
이 작전은 이스라엘이 다시 반격할 수 있는 결정적인 힘이 되어주었어.

소련 역시 시리아와 이집트에 전투 장비를 꾸준히 지원했지만,

직접적인 무력 개입은 하지 않았어.
그러나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미국과 소련은

핵 경보 수준까지 높이는 위기에 이르기도 했지.
전쟁 하나가 세계 대전급 갈등으로 비화될 뻔한 순간이었던 거야.

 

4. 전쟁이 낳은 변화 – 아랍의 자존심 회복, 이스라엘의 현실 인식

이집트와 시리아는 최종적으로 영토를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지만,
**이스라엘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상징적인 ‘심리적 승리’**를 얻었어.


특히 이집트는 “우리는 수에즈 운하를 건넜다”는 것만으로도 자존심을 회복했고,
나세르 이후 집권한 사다트 대통령은 이 전쟁을 발판 삼아

국제 외교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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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이스라엘은 “우리는 무적이다”라는 자신감을 잃게 되었고,
전쟁 이후 총리 골다 메이어는 여론의 압박으로 사임하게 돼.
국민들은 “어떻게 전쟁을 예측하지 못했나”, “정보기관은 뭐 했나”라며 분노했고,
자기반성과 내부 개혁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지.

 

이 전쟁은 이스라엘 사회의 내적 변화,

그리고 중동 전체의 외교 지형 변화를 불러왔어.
결국 이 전쟁은 단순한 전투의 승패가 아니라,
평화 협상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 중요한 분기점이었지.

 

5. 전쟁 후의 평화 외교 –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파격적인 화해

욤키푸르 전쟁이 끝난 후, 몇 년이 지나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할 선택을 해.
1978년, 미국 캠프데이비드에서 역사적인 평화협정이 체결돼.


**사다트(이집트 대통령)**와 **베긴(이스라엘 총리)**이 악수를 하고,
이집트는 아랍권 국가 중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공식 인정하게 된 거지.

그 뿌리는 바로 이 욤키푸르 전쟁에 있었던 거야.


무력으로는 완전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걸 양측 모두 깨달았고,
그 현실적인 인식이 타협과 평화라는 길로 이어졌던 거야.

 

욤키푸르 전쟁은 단순히 전장의 승패를 가르는 전투가 아니었어.
이건 중동 정치, 아랍 민족의 자존심, 이스라엘의 안보, 미국과 소련의 대결구도…
모든 것이 얽힌 거대한 격돌이었지.

 

그리고 그 전쟁은 이후의 평화 협상과 중동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어.
이스라엘과 아랍의 갈등은 끝나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 모두가 전쟁의 상처와 교훈을 안고

조금은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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