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에즈 운하, 단순한 물길이 아니었어
1956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또다시 충돌하게 돼.
그런데 이 전쟁은 단순한 국경 다툼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이집트가 모두 얽힌 국제적인 대결이었어.
전쟁의 무대는 수에즈 운하. 이 운하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해상 무역의 핵심 길목이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국제 회사가 운영하고 있었지.
그런데 이집트의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가
느닷없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다고 선언했어.
"우리는 우리 운하를 우리가 관리하겠다!"라는 거지.
이 말은 곧 영국과 프랑스의 이익을 강하게 건드리는 일이었고,
두 나라는 당장 행동에 나서기로 해.
2. 이스라엘의 입장 – 그냥 끼어든 게 아니었어
그런데 여기서 의외의 나라가 등장해. 바로 이스라엘.
"수에즈 운하랑 이스라엘이 무슨 상관이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도 쌓이고 쌓인 갈등이 있었거든.
이집트는 1948년 1차 중동전쟁 이후부터
이스라엘 선박의 티란 해협(Tiran Strait) 통과를 금지했어.
이 해협은 **이스라엘 남부 항구 에일랏(Eilat)**로 들어가는
유일한 바닷길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지.
게다가 이집트가 가자지구에 군사기지를 구축하고,
**팔레스타인 무장조직(페다인)**을 통해 국경을 계속 침투하는 등,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더는 못 참는다"는 분위기가 무르익었어.
3. 비밀 동맹 – 삼국이 짠 계획
그때 영국과 프랑스가 이스라엘에게 은밀하게 손을 내밀었어.
"네가 먼저 이집트를 공격하면, 우리가 '중재'를 명분으로 개입할게.
그러면서 수에즈 운하를 다시 되찾는 거야."
이게 바로 삼국동맹 작전이었어.
이스라엘은 계획대로 1956년 10월 29일,
시나이 반도를 통해 이집트를 기습 공격했고,
빠르게 가자지구와 시나이 대부분을 점령했어.
곧이어 영국과 프랑스가 “양쪽 다 철수하라”며 개입했지만,
사실상 이집트군만 공격한 거지.
4. 국제사회의 분노 – 특히 미국과 소련
그런데 전쟁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어.
당시 냉전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은 중동에서
전쟁이 커지는 걸 원하지 않았어.
특히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시절처럼
행동한 걸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지.
결국 유엔이 개입하게 되고,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철수해야 했어.
이스라엘도 시나이 반도를 포기하고 물러나야 했지.
하지만 미국은 이스라엘이 티란 해협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국제 감시단(UNEF)**의 배치를 허용했어.
이건 이스라엘에게 작은 성과였지만,
전반적으로는 다들 좀 씁쓸한 결말이었지.
5. 수에즈 위기의 의미 – 제국의 몰락과 중동의 변화
이 사건은 단순한 무력 충돌이 아니었어.
몇 가지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냈지.
- 첫째, 영국과 프랑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세계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사실상 잃게 돼. 두 나라는 더 이상 독자적인 군사 행동을 하기가 어려워졌고, 냉전 체제 속에서 미국의 그늘 아래 들어가게 돼.
- 둘째, 이집트의 나세르는 이 전쟁에서 군사적으로는 졌지만,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승리했어. 아랍 세계에서는 "서방의 압력에도 당당하게 맞선 지도자"로 추앙받게 되고, 이후 아랍 민족주의의 아이콘이 되었지.
- 셋째, 이스라엘은 제한적인 성공을 거뒀지만, 중동에서 고립된 이미지가 더욱 강화되었어.
팔레스타인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고, 가자지구는 여전히 긴장의 땅으로 남았지.
결국 수에즈 위기는, 세계 질서가 ‘식민 제국의 시대’에서
‘냉전 양강 체제’로 넘어가는 전환점이었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안보를 위해 움직였지만,
국제사회에서 단독 행동의 위험을 체감했고,
앞으로는 더 큰 전략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지.
이집트는 패전했지만, 아랍 세계에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세웠고,
수에즈 운하는 결국 이집트의 손에 남게 되었어.
중동은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전쟁과 평화의 전선이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