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국 다음 날, 바로 터진 전쟁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했어.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주변 아랍 국가들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이라크까지...
다섯 개 나라가 연합해서 이제 막 생긴 이스라엘을 없애겠다고 나선 거야.
이 전쟁은 1차 중동전쟁 또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이라고 불려.
전쟁은 너무 갑작스럽게 시작됐고,
이스라엘은 신생국이었기 때문에 정규군조차 제대로 없었어.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하가나(Haganah)라는 지하 민병대를 중심으로 조직을 정비했고,
유럽에서 홀로코스트를 피해온 생존자들과 유대인 자원병들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지.
2. 예상 밖의 결과 – 이스라엘의 승리
아랍 국가들은 인원수와 장비면에서 이스라엘보다 훨씬 우세했어.
하지만 의외로 전쟁은 이스라엘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지.
왜일까?
첫째, 아랍 측은 연합을 했다고는 하지만 서로 제대로 협력하지 못했어.
각국은 각자의 이익을 생각했고, 전술적으로도 일관되지 않았지.
둘째, 이스라엘은 절박함이 있었어.
이 전쟁에서 지면 나라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있었고,
모든 국민이 총을 들다시피 전쟁에 임했지.
셋째, 미국과 유럽 유대계의 재정적·외교적 지원도 큰 도움이 되었어.
특히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들여온 무기들이 전세를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어.
결국 1949년 초, 유엔의 중재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스라엘은 예상보다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한 상태에서 전쟁을 끝냈어.
3. 요르단, 이집트, 팔레스타인의 상처
전쟁의 결과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승리만은 아니었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는 '나크바(Nakba)', 즉 대재앙이 되었지.
유대인들은 독립을 얻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나라를 잃었고, 집을 잃었고, 삶의 터전을 잃었어.
요르단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웨스트뱅크)**를,
이집트는 가자지구를 각각 점령했고,
팔레스타인은 오히려 자신들만의 독립 국가를 세우지도 못한 채
주변국에 분할되는 신세가 되었지.
무엇보다, 약 70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했어.
그들은 지금까지도 난민 상태로,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어.
이들은 언젠가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갈 권리, 즉 '귀환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
4. 전쟁이 남긴 영토와 분쟁의 씨앗
이스라엘은 유엔이 할당한 영토보다 약 23% 이상 더 많은 땅을 확보했어.
반면 팔레스타인 국가의 계획은 사실상 무산되었고,
이후 독립국가를 만들기 위한 꿈은 수십 년 동안 유예되었지.
이 전쟁은 단순한 전투의 문제가 아니었어.
이스라엘의 생존권 vs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이라는 핵심적인 대립 구도가 생겼고,
이건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어.
또한 전쟁은 이스라엘 내부의 안보 우선 정책, 군사 중심 사회를 낳는 기반이 되었어.
이스라엘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총을 들 수밖에 없는 나라가 되었고,
주변국들 역시 언제든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군사력을 키워왔지.
5. 전쟁 후의 중동 – 끝이 아닌 시작
1차 중동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평화가 온 건 아니었어.
오히려 이 전쟁은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중동전쟁의 시작이었어.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는 점점 커졌고, 그 분노는 결국 무장 조직의
결성과 테러, 국제적 분쟁으로 이어졌지.
이스라엘 역시 더 강한 군대와 정보력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결국 중동은 냉전시대의 한복판에서 불안정한 전장이 되었어.
1차 중동전쟁은 단순한 땅 싸움이 아니었어.
나라를 찾은 자들과 나라를 잃은 자들 사이의 깊은 감정,
역사, 종교, 문화가 얽힌 갈등의 서막이었지.
이스라엘은 건국과 동시에 강해져야 했고,
팔레스타인은 이때부터 지금까지도 ‘나라 없음’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어.
중동의 갈등은 여기서 시작됐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뉴스 속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의 뿌리도 바로 이 순간에 있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