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유럽 전역은 전례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어.
당시 영국은 독일 제국과 맞서 싸우며
유럽, 아프리카, 중동 등지에서 치열한 전선을 벌이고 있었지.
그런데 문제는 전쟁이 길어질수록
병력과 물자, 외교적 지지가 턱없이 부족해졌다는 거야.
특히 중동 전선은 영국에게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어.
왜냐하면 오스만 제국이 독일과 동맹을 맺고
이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바로 이때, 영국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지지와 협력을 얻기 위해 정치적 한 수를 두게 돼.
2. 벨푸어 선언의 탄생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Arthur Balfour)**는
런던의 유대인 지도자였던 **라이오넬 로스차일드(Lionel Rothschild)**에게
한 통의 서한을 보냈어.
그 서한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지만,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큰 파장을 낳았지.
“전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민족의 고향(national home)을 세우는 것을
호의적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벨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이야.
겉보기에 짧은 정치적 성명이지만,
이 선언은 현대 중동 분쟁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왜냐하면 이 말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이 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국제적 인정을 처음 얻어낸 문서였기 때문이지.
3. ‘모호한 약속’의 함정
벨푸어 선언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작성되었어.
대표적으로 이런 구절이 있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고향(national home)**을 세우는 것을 지지하되,
그곳에 이미 거주하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해치지 않아야 한다.”
이 말은 얼핏 균형 있어 보이지만,
사실 말장난에 가까운 표현이었어.
- 유대인에게는 민족적 자결권을 보장하면서도
- 아랍인에게는 시민적, 종교적 권리만 언급했거든.
즉,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이나 국가 수립 가능성에 대해
어떠한 보장도 받지 못한 거야.
이 문장은 훗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게 돼.
4. 이중적인 외교 정책 – 아랍에게도 약속했는데?
더 황당한 건,
영국은 이 선언을 발표하기 불과 1~2년 전,
**맥마흔-후세인 서한(McMahon-Hussein Correspondence)**이라는
비공식 서한을 통해 아랍 세계에도 독립을 약속했다는 거야.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세력이 필요했어.
그래서 메카의 지도자 후세인에게
“오스만이 지배하던 아랍 지역을 너희에게 주겠다”고 약속했지.
결과적으로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에게도, 아랍인에게도 모두 주겠다고 말한 셈이야.
전쟁 중에는 서로 다른 상대에게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전쟁이 끝난 후엔 책임을 회피한 거지.
5. 유대인들의 반응 – 희망과 갈등의 시작
벨푸어 선언이 발표되자,
전 세계 유대인 사회는 들썩였어.
- 시온주의자들은
“드디어 국제 사회가 우리의 국가 수립을 인정했다”며 환호했고, - 유럽 각국에서는 유대인 이주자들의
팔레스타인행 움직임이 본격화되었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그곳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라는 우려도 있었어.
특히 유럽계 유대인(아슈케나지)과 중동·북아프리카 출신 유대인(미즈라히)의
문화적 차이, 생활 방식의 충돌도 조용히 싹트기 시작했지.
또한 팔레스타인 현지의 아랍 주민들은
이 선언을 외세에 의한 침탈의 시작으로 인식했고,
긴장감은 곧 갈등으로 번져나가게 돼.
6. 선언의 정치적 배경 – 전쟁과 유대인 영향력
벨푸어 선언의 이면에는
순수한 ‘인도주의’보다 정치적 계산이 더 크게 작용했어.
당시 영국 내에서는
유대인 금융가와 지식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고,
미국의 우드로 윌슨 행정부 역시
유대계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거든.
즉, 벨푸어 선언은
“유대인의 지지를 끌어들여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고,
전쟁 자금과 외교적 후방을 안정시킨다”는
냉정한 전략의 일환이었던 거야.
이처럼 벨푸어 선언은
한 줄의 짧은 문장 속에 어마어마한 역사적 후폭풍을 담고 있었어.
유대인에게는 국가의 꿈을 현실로 만드는 발판이었고,
아랍인들에게는 땅을 빼앗긴 시작점으로 기억되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