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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이야기] 18. 바르 코크바 반란 – 최후의 독립 저항과 디아스포라

by 지금이순간마법처럼 2025.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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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성전의 파괴 이후, 유대인들의 충격

로마에 의해 제2성전이 파괴된 뒤,
유대인 사회는 말 그대로 무너졌어.


신앙의 중심이 사라졌고,
성전 제사도 사라졌지.

하지만 유대인들은 단념하지 않았어.
그들은 아직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고,
언젠가 성전을 재건하겠다는 희망도 품고 있었지.

라삐들은 율법 중심의 새로운 유대교 체계를 세워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애썼고,
정치적·군사적인 갈망은 여전히 숨죽인 불씨로 남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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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도발 – ‘예루살렘의 재건은 금지’

그런데 이 희망을 송두리째 꺾은 인물이 등장해.
바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야.

그는 예루살렘을 로마식 도시로 완전히 개조하려 했고,
그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꿨어.
그리고 유대인이 성전에 접근하는 것조차 금지했지.

거기에다, 성전 터에는 로마 신인 주피터 신전을 세우려고 했어.
유대교의 핵심을 완전히 짓밟은 거지.

이건 유대인들에게 단순한 모욕이 아니었어.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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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르 코크바의 등장 – 메시아인가, 반란군인가?

이 절망적인 시기에, 한 인물이 떠올라.
그 이름은 시몬 바르 코크바(Simon Bar Kokhba).
그의 본명은 시몬 벤 코세바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별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 코크바(Bar Kokhba)**라고 불렀어.

라삐 아키바(Rabbi Akiva)는
그를 메시아로 인정했어.
정말 나라를 되찾을 지도자로 여긴 거야.

그리고 바르 코크바는 무장 반란을 시작했어.


132년경, 반란군은 로마군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의 일부를 탈환했지.
심지어 임시 정부를 세우고 화폐도 발행했어.
그 화폐엔 “이스라엘의 자유를 위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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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자비한 진압 – 유대인의 최후 저항

하지만 로마는 이번에도 강경했어.
하드리아누스는 당시 최고의 장군인 율리우스 세베루스를 보내
유대 반란을 철저하게 진압하게 해.

이 전쟁은 게릴라 전쟁의 형태였고,
산속 요새와 동굴을 거점 삼아 로마군과 싸웠지.
대표적인 전투지 중 하나가 바로 베타르 요새였어.

하지만 결국 135년, 베타르가 함락되었고
바르 코크바도 전사하게 돼.

이때 수십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어.
일부 기록에 따르면 최대 50만 명이 죽었다는 말도 있어.

5. 완전한 추방 – 디아스포라의 현실화

로마는 유대인들이 다시는 반란을 꿈꾸지 못하게 만들었어.
예루살렘에 유대인의 접근을 영원히 금지했고,
남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추방되었지.

그리고 '유다(Yehuda)'라는 이름조차 없애고,
이 지역을 **'팔레스티나(Palestina)'**라고 불렀어.
이건 유대인의 흔적을 지우려는 상징적인 행위였어.

그 결과, 유대인들은 세계를 떠도는 민족, 디아스포라가 되었어.


로마, 바빌론, 스페인, 북아프리카, 동유럽 등으로
각기 흩어져 살아야 했지.

그들은 이제 하나의 나라가 아닌,
공동체만 유지한 채 박해와 차별 속에서 살아남는 길을 찾아야 했어.

6. 역사적 의미 – 기억, 상처, 신앙의 불씨

바르 코크바 반란은 유대인의 마지막 무장 독립 시도였어.
그 이후로 2000년 가까이, 유대인은
자신들의 나라 없이 살아가야 했지.

하지만 그 불씨는 사라지지 않았어.
디아스포라 속의 유대인들
고난 속에서도 율법을 지켰고,
‘예루살렘에 다시 모이자’는 희망을 잊지 않았어.

이게 바로 훗날 이스라엘 국가 재건으로 이어지게 된
정신적인 근원이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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