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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이야기] 4. 이슬람의 침공(711) – 무어인의 등장과 코르도바 정복

by 지금이순간마법처럼 2025.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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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침공, 바다 건너 온 새로운 세력

711년, 이베리아 반도에 거대한 전환점이 찾아왔어. 북아프리카에서 출발한 무슬림 군대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땅에 발을 디딘 거야. 이들은 '무어인'이라 불렸고, 대부분은 베르베르족이었지만 아랍인 사령관의 지휘를 받고 있었어. 당시 북아프리카는 우마이야 왕조의 통치 아래 있었고, 이슬람은 눈부시게 확장하고 있었지. 서고트 왕국은 내부의 분열과 왕위 쟁탈전으로 혼란스러웠고, 그것이 이 침공을 가능하게 만든 결정적 이유 중 하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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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리크 왕의 몰락과 서고트 왕국의 붕괴

서고트 왕국의 마지막 왕, 로데리크는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슬람 군대와 711년경 ‘구달레테 전투’에서 맞서 싸웠어.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지. 무어인들은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로데리크는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어. 이 한 번의 전투로 서고트 왕국은 사실상 붕괴되었고, 무어인들은 거침없이 북상해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지. 몇 년 사이에 무슬림은 토레도, 사라고사, 세비야, 코르도바 등 주요 도시를 차례로 장악했어.

코르도바, 무어인의 중심이 되다

코르도바는 이슬람 정복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어. 과거 로마와 서고트 시대부터 중요한 도시였던 코르도바는 전략적 위치, 물자, 문화적 기반 모두 갖춘 도시였지. 716년, 이슬람 정복자들은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행정과 군사 거점을 정비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르도바는 이슬람 히스파니아의 심장이 되었어. 특히 우마이야 왕조의 후계자인 압둘 라흐만 1세가 756년 코르도바에서 독자적으로 '코르도바 에미리트'를 세우면서 이 도시는 명실상부한 이슬람 세계의 중심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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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문명의 이식과 융합

이슬람의 침공은 단지 군사적 점령으로 끝나지 않았어.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 이슬람 문화를 깊이 뿌리내리게 했지. 새로운 건축 양식, 수학, 천문학, 의학, 철학, 농업 기술 등 다양한 지식과 기술이 유입되었고, 스페인 지역의 문화적 지형을 바꿔놓았어. 코르도바는 10세기 들어 ‘코르도바 칼리프국’으로 승격되며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로 부상했지. 당시 이 도시는 수십만 명의 인구와 수천 권의 서적이 보관된 도서관, 병원, 대학을 갖춘 문화의 중심이었어.

기독교인과 유대인, 그리고 무슬림의 공존

무슬림 정권은 기본적으로 ‘딤미(dhimmi)’라는 개념을 통해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존재를 인정했어. 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는 대신 ‘지즈야(인두세)’를 내고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지. 물론 차별과 제한은 있었지만, 당시 유럽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관용적이었어. 그래서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이 같은 도시에서 함께 살아가며 지식과 문화를 공유하는 독특한 사회가 형성되었지. 특히 유대인들은 코르도바에서 번역가, 의사, 학자 등으로 큰 역할을 했고, 이 시대를 ‘세파르디 황금기’라 부르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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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작된 긴 긴 저항의 역사

무어인의 이베리아 정복은 한순간에 끝난 일이 아니었어. 북쪽의 피레네 산맥 너머, 크고 작은 기독교 왕국들은 살아남아 있었고, 그들은 무어인의 지배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지.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대표적이야. 722년, 펠라요가 이끄는 기독교인들이 '코바동가 전투'에서 무슬림을 물리친 사건은 상징적으로 중요했어. 이 전투는 '레콩키스타(재정복 운동)'의 시작으로 여겨졌고, 이후 수백 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는 종교와 문화, 민족이 얽힌 전장의 중심이 되었지.

711년의 침공은 단순한 정복이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 대전환이었어. 새로운 문명과의 충돌, 충격, 그리고 융합이 이 시기를 특징짓고 있지. 스페인의 정체성은 바로 이 무어인의 등장과 그에 대한 대응 속에서 형성되어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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