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스페인 이야기] 19. 1588년 무적함대의 몰락 – 영국과의 대결

by 지금이순간마법처럼 2025. 7. 1.
728x90
반응형
SMALL

이번에는 1588년에 벌어진 스페인의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 몰락에 대해 이야기해볼게. 이 사건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어. 유럽의 해상 패권, 종교 전쟁, 그리고 국가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었지. 결과적으로는 스페인의 상징이었던 무적함대가 무너지면서, 세계 질서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어.

반응형

가톨릭 왕 펠리페 2세의 영국 원정 계획

1580년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는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했어. 그는 유럽 전역에서 **프로테스탄트(신교)**가 확산되는 걸 막고 싶었고, 특히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신교를 공인하고, 가톨릭을 박해하며, 네덜란드의 반란을 지원하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지.

더구나 엘리자베스는 해적 출신 선장들—대표적으로 프랜시스 드레이크—을 후원하면서, 스페인의 아메리카 보물선들을 약탈하고 있었어. 게다가 1587년엔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영국에서 처형당하면서, 펠리페는 영국을 정복할 명분까지 갖게 된 거야.

그리하여 그는 **‘무적함대’(La Armada Invencible)**라 불리는 대규모 함대를 편성했어. 이 함대는 130여 척의 배에 2만 명이 넘는 병력을 실은 거대한 원정군이었지. 그의 계획은 단순했어. 이 함대가 영국 해협을 건너 플랑드르(지금의 벨기에)에서 출병할 육군과 합류해서 런던을 점령하는 것이었어.

 

엘리자베스 1세와 영국의 해군 전략

한편 영국은 무력으로 스페인 함대를 막아야 했어. 엘리자베스는 당시 해상 경험이 풍부한 프랜시스 드레이크찰스 하워드 같은 해군 지휘관들에게 작전을 맡겼지.

영국 해군은 스페인보다 배는 작았지만, 훨씬 더 빠르고 기동성이 뛰어났어. 그리고 가장 큰 차이는 화포 사용 방식이었어. 스페인 함선은 수병들이 적의 배에 올라가서 싸우는 전통적인 방식에 익숙했지만, 영국은 거리에서 대포를 집중적으로 쏘는 방식을 사용했지.

게다가 드레이크는 무적함대가 출항하기 전에 카디스 항구를 기습 공격해서 선박을 파괴하고 보급을 지연시키는 작전을 벌이기도 했어. 이걸 드레이크는 **‘스페인의 수염을 깎았다’**고 표현했지. 그만큼 선제공격에 성공한 셈이었어.

728x90

1588년의 대결 – 해상에서 벌어진 심리전

1588년 7월, 무적함대는 마침내 출항해서 영국 해협으로 향했어. 하지만 출발부터 순조롭지 않았지. 기상 악화로 여러 번 항로를 수정했고, 식량과 담수 부족 문제가 심각했어.

영국 해군은 잽싸게 움직였고, 플리머스, 포틀랜드, 솔렌트 해협 등지에서 계속해서 스페인 함대를 괴롭혔어. 영국은 직접적인 충돌보다는 공격하고 물러서는 유인 전술로 스페인 함대를 지치게 만들었지.

가장 결정적인 전투는 칼레 앞바다에서 벌어졌어. 영국군은 밤에 **불붙인 배(fire ships)**를 스페인 함대 사이로 흘려보냈고, 스페인 배들은 혼란 속에 흩어졌어.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영국은 **그라블린 해전(Battle of Gravelines)**에서 대규모 포격을 가했어.

결국 스페인 함대는 육군과 합류하지 못했고, 심각한 피해를 입은 채 북쪽 바다로 후퇴하게 돼.

 

북해에서의 재앙 – 날씨가 결정했다

영국과의 직접 전투도 문제였지만, 무적함대의 진짜 몰락은 기상 악화였어. 퇴각하는 스페인 함대는 북해를 돌아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거쳐 귀환하려 했는데, 거센 폭풍과 조류에 휘말려 많은 배가 침몰하거나 난파했지.

배는 부서지고 수많은 병사들이 해안에서 익사하거나 굶어죽었어. 생존자 중 일부는 아일랜드 해안에 도착했지만, 현지인들에게 붙잡히거나 처형당했지. 결국 스페인으로 돌아온 배는 60척도 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대부분 손상된 상태였어.

이렇게 무적함대는 전투보다 기후에 의해 더 큰 타격을 입었고, 펠리페 2세의 대영국 원정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어.

SMALL

무적함대의 몰락, 세계의 균형을 바꾸다

이 사건은 스페인 제국의 패권에 처음으로 균열을 만든 사건이었어. 물론 스페인은 이후에도 강대국이었고,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은으로 여전히 부유했지만, 해상에서의 지배력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았지.

한편 영국은 이 승리를 계기로 해양 강국으로 부상하게 됐어. 해군력을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했고, 17세기 이후에는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 식민지 개척과 무역 네트워크 확장에 집중하게 돼.

종교적으로도 가톨릭과 신교의 대결에서 상징적인 분기점이 되었고, 유럽의 국가들은 점점 자신의 종교와 정치 체제를 독자적으로 구축하게 됐어.

 

무적함대의 몰락은 단순한 해전의 실패가 아니라, 스페인 제국이 꿈꾸던 절대적 통일의 한계를 보여준 사건이었어. 신의 뜻을 믿으며 배를 띄운 펠리페 2세, 그리고 전략과 바람을 활용한 엘리자베스 1세. 그 대결은 신념과 현실, 권위와 변화가 충돌한 역사적인 순간이었지. 그리고 그날 이후, 유럽은 다시는 이전과 같을 수 없었어.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