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바다를 향한 집념
이 사건은 단순히 항해의 성공이 아니라, 스페인을 세계 제국으로 도약시킨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어.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항해사였어. 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당대의 일반적 지식을 바탕으로, 서쪽으로 항해하면 인도와 중국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고 믿었지. 물론 당시 유럽인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크기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거야.

콜럼버스는 이 계획을 실현하려고 포르투갈, 잉글랜드, 프랑스의 왕들에게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당했어. 비용 대비 위험이 너무 크다고 본 거지.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었어. 처음엔 그들도 망설였지만, 1492년 그라나다를 정복하면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후, 스페인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지. 내부 문제를 정리한 뒤 해외 팽창을 위한 탐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야.
이사벨은 콜럼버스의 계획에 모험을 걸었고, 결국 세 척의 배 – 산타 마리아, 핀타, 니냐를 제공해주게 돼.
1492년 8월의 출항, 그리고 미지의 대륙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팔로스 항구를 떠났어. 그들은 대서양을 가로질러 70일 이상 항해했지. 시간이 지날수록 선원들은 점점 불안에 떨었고, 반란의 조짐도 있었어. 하지만 콜럼버스는 끝까지 항로를 믿고 버텼고, 결국 10월 12일, 오늘날의 바하마 제도 근처인 산살바도르 섬에 도착했어.

콜럼버스는 그곳을 인도 근처의 섬이라고 생각했고, 섬 주민들을 **‘인디언’(Indios)**이라 불렀지. 그는 쿠바와 히스파니올라 섬까지 탐험한 뒤, 귀국길에 올랐어. 그는 진짜 인도에 도달했다고 믿었고, 왕과 여왕에게 황금, 원주민, 이국적인 동식물들을 선물로 가져왔지.
스페인 왕실의 반응과 후속 항해
콜럼버스의 귀환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어.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그를 **‘바다제독’과 ‘인도 총독’**으로 임명했고, 더 많은 배와 인력을 제공해줘서 이후 1493년, 1498년, 1502년까지 총 4차례의 항해가 이어졌어.

하지만 갈수록 콜럼버스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돼. 그는 신대륙을 식민화하면서 원주민들에게 과도한 폭력을 가했고, 관리 능력도 부족했거든. 결국 1500년에는 총독직에서 해임됐고, 수갑을 차고 스페인으로 돌아오게 돼. 왕실은 그의 탐험은 인정하면서도, 권한은 박탈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첫 항해는 스페인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끄는 문을 열었고, 그 뒤를 따라 수많은 정복자들이 신대륙을 침략하게 돼.
콜럼버스의 발견, 누가 발견한 걸까?
사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이 ‘신대륙’이라는 걸 죽을 때까지 몰랐어. 그는 죽는 날까지 자신이 아시아에 도달했다고 믿고 있었지. 진짜로 이곳이 아시아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대륙이라는 것을 밝힌 건 아메리고 베스푸치였고, 그래서 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붙여졌어.
콜럼버스가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에는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원주민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지.
잉카, 아즈텍, 마야 등은 모두 고유의 언어와 신앙, 농경문화를 갖고 있었는데, 유럽인들은 그들의 땅을 '발견'했다는 이름으로 식민화와 착취를 시작하게 된 거야.
1492년, 세계사적 전환점
콜럼버스의 항해는 단순한 탐험의 성공이 아니라, 유럽 중심의 세계 질서를 만들어낸 첫걸음이었어. 이 해는 스페인에게 세 가지 의미가 있었지. 그라나다 정복, 유대인 추방령, 그리고 신대륙 발견. 내부를 정리하고, 외부를 향한 팽창을 선언한 해였어.
이후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며 은과 금을 쏟아부었고, 16세기 최고의 제국으로 거듭나게 돼. 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원주민들이 전염병, 노예화, 학살로 목숨을 잃었고, 이건 정복의 어두운 그림자로 남았어.
콜럼버스는 한 인간의 집념이 어떻게 세계사를 뒤흔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인물이었어. 동시에 그가 일으킨 변화는 빛과 어둠, 기회와 파괴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지. 그래서 1492년은 단지 대륙을 ‘발견한’ 해가 아니라, 인류사의 균형이 새롭게 흔들리기 시작한 해로 기억되고 있어.
이번에는 1492년 이후 스페인이 보여준 가장 극단적인 정책 중 하나인 무슬림과 유대인의 추방에 대해 이야기해볼게. 이 사건은 단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었어. 스페인의 정체성을 단일한 가톨릭 국가로 재편하려는 의지, 그리고 정치적 통합과 권력 강화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
다문화 공존의 마지막 시대
그라나다가 함락되기 전까지, 스페인은 오랜 세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함께 살아가는 다문화 공존의 땅이었어. 코르도바 칼리프국 시절에는 무슬림, 유대인, 기독교인이 함께 도시를 꾸려나가며 문화적 황금기를 누렸고, 알안달루스 지역은 학문과 과학, 철학이 꽃피던 곳이었지.
하지만 기독교 왕국의 반격이 거세지고, 특히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통합 왕국이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급격히 달라졌어. 국토를 되찾았다는 자부심과 함께, '이제는 종교적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거야.
유대인 추방령 – 1492년의 충격
1492년 3월, 스페인 왕실은 유대인에 대한 **알함브라 칙령(Alhambra Decree)**을 발표했어. 이 칙령은 명확했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 모든 유대인은 4개월 안에 스페인 땅을 떠나라는 것이었어. 이유는 단순했어. 개종한 유대인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간다는 의심, 그리고 ‘기독교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조치라는 거였지.

이 명령으로 약 20만 명의 유대인이 스페인을 떠났고, 떠나는 길에 재산은 거의 몰수되거나 헐값에 처분해야 했어. 일부는 포르투갈, 오스만 제국, 북아프리카로 갔고, 일부는 이탈리아, 네덜란드로 향했지. 당시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2세는 “스페인 왕은 자기 나라를 가난하게 만들고, 우리를 부유하게 만들었다”는 말까지 남겼을 정도야.
이로 인해 스페인은 수세기 동안 상업, 금융, 의학, 학문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던 유대인 공동체를 한순간에 잃게 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