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시작된 로마의 관심
기원전 3세기, 지중해를 두고 벌어진 두 강대국의 대결 –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은 히스파니아 땅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다. 당시 히스파니아는 이베리아인과 켈트족, 그리고 이들의 혼합인 켈티베리아인이 살아가는 복잡한 지역이었고, 카르타고는 이 땅에서 은과 군사력을 확보하며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한 그 유명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무대 뒤에는, 로마와 카르타고가 히스파니아를 두고 벌인 전략적 경쟁이 있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뿌리를 끊기 위해 히스파니아로 군을 파견했고, 그 과정에서 이 지역을 사실상 식민지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군사 정복에서 행정 통치로
기원전 206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히스파니아 남부의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내며 로마의 히스파니아 정복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로마는 점차 북쪽과 내륙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저항하는 켈티베리아 부족들과 오랜 전쟁을 벌였다. 특히 누만시아 전투(기원전 133년)는 로마가 히스파니아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얼마나 치열한 저항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다. 로마는 전통적인 군사력뿐 아니라, 속주화라는 행정적 수단을 통해 히스파니아 전역을 로마 제국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히스파니아는 크게 히스파니아 시테리오르(동부)와 울테리오르(서부)로 나뉘어 속주화되었으며, 이후 행정구역은 여러 번 조정되었다.
도로의 건설과 도시의발전
로마가 히스파니아에서 한 가장 획기적인 변화 중 하나는 바로 도로망의 구축이었다. 로마는 군사적 이동뿐 아니라, 상업과 통치를 위해 도로를 체계적으로 건설했다. 대표적인 도로로는 '비아 아우구스타(Via Augusta)'가 있는데, 이 도로는 히스파니아 동부 해안을 따라 이어져 프랑스 갈리아 지방까지 연결되었다. 도로는 도시의 발전을 촉진시켰고, 에메리타 아우구스타(현 메리다), 타라고(현 타라고나), 카르타고 노바(현 카르타헤나) 같은 로마 도시들이 세워졌다. 이 도시들은 원형극장, 목욕탕, 수도교, 포럼 같은 로마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히스파니아 전역의 로마화(Romanization)를 이끄는 중심이 되었다.
언어와 문화의 로마화
히스파니아의 정복은 단순한 군사 지배에 그치지 않았다. 로마는 현지의 언어, 법, 문화에 깊이 영향을 끼쳤고, 가장 뚜렷한 변화는 언어였다. 라틴어는 행정과 교육, 종교 등에서 표준 언어로 자리잡았고, 시간이 흐르며 각 지역 고유 언어와 융합되어 스페인어의 기원이 되었다. 또한 로마법이 정착되어 도시와 사회를 규율하였으며, 로마 시민권을 받은 히스파니아 출신의 사람들이 점차 로마의 정치적 무대에 진출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트라야누스 황제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히스파니아 출신이라는 사실은, 이 지역이 단순한 식민지를 넘어서 로마의 핵심 일부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히스파니아, 로마 제국의 충실한 속주로
로마 제국 말기까지 히스파니아는 로마의 안정된 속주로 기능했다. 다양한 곡물, 은, 구리, 철과 같은 자원이 로마로 흘러들어갔고, 로마식 도로와 도시 구조는 후대까지 이어졌다. 동시에 로마 제국의 문화와 법, 언어가 히스파니아에 깊이 뿌리내려, 오늘날 스페인의 정체성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히스파니아는 로마가 남긴 문화적 유산과 유럽 문명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으로, 정복 이후 새로운 스페인의 출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