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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이야기] 판쩌우찐과 개혁주의 운동 – 민중을 위한 자유, 평등, 법치의 외침

by 지금이순간마법처럼 2025.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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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베트남 독립운동은
단순한 지식인 중심에서
학생, 농민, 노동자, 군인까지

함께하는 대중 운동으로 넓어지게 돼.

 

그리고 또 한 명의 큰 인물,
판쩌우찐이 등판하면서
독립운동의 방식과 철학이 더 다양해져.

 

이번엔 베트남 독립운동의 또 다른 얼굴,
판쩌우찐(Phan Châu Trinh)의 이야기를 해볼게.

 

앞에서 이야기한 판보이쩌우가
무장 투쟁과 외교를 중심으로

독립을 꿈꿨다면,


판쩌우찐은 무기를 드는 대신,

교육, 법, 사상 개혁을 통해
민중이 스스로 깨어나는 길을 택했어.

 

그는 “나라를 되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나라를 제대로 운영할

국민을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지.

 

지식인은 독립을 외쳐야 하는 시대

판쩌우찐은 1872년,

꽝남 지역에서 태어났어.


유교 교육을 받고 과거 시험에도

합격한 엘리트였지만,
당시 사회 현실을 보며 깊은 회의를 느꼈지.

 

“왕이 나라를 지배하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백성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는 베트남을 독립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봤고, 진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판보이쩌우와의 차이점

판쩌우찐은 처음엔 판보이쩌우와 함께

활동했지만 곧 노선 차이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돼.

 

판보이쩌우는 일본에 유학 보내고,

무장 투쟁을 준비하며
왕정을 복원하자는 입장이었고,

 

판쩌우찐은 왕정 자체를 문제 삼았고,
공화주의, 자유주의, 법치주의,

교육 개혁을 주장했어.

그는 “민중이 깨어나지 않으면
왕이 바뀌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지.

프랑스로 간 이유 – 적을 알기 위해 적의 땅으로

1906년, 그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직접 서구의 문명을 배우고,
베트남의 개혁 방향을 고민했어.

 

그곳에서 그는 유럽의 정치 철학, 인권 사상,

자유주의 교육을 접하고 “이걸 베트남에 맞게

바꾸어 전파하자”고 생각했지.

 

그는 프랑스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베트남 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리고,
문명화된 독립운동을 시도했어.

“민족을 구할 힘은 민중 안에 있다”

판쩌우찐은 “동양의 도덕과 서양의 기술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무엇보다 교육의 힘을 믿었어.

 

그래서 그는 베트남으로 돌아와

학교를 세우고, 신문을 만들고,

계몽 강연과 토론회를 열었어.

 

그의 목표는 무기를 드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백성을

만드는 것이었지.

식민지 정부의 탄압과 투옥

하지만 프랑스 당국은 판쩌우찐의 활동을

불온하게 봤고, 그는 결국 1913년에 체포되어

코친차이나 감옥에 수감돼.

그는 수감 중에도 글을 쓰고,

사람들을 교육했으며,
1925년 석방될 때까지 강한 정신력으로

운동을 이어갔어.

 

그 후 건강이 나빠졌지만,
마지막까지 지식인의 길,
말과 글로 싸우는 비폭력 저항의 길을 걸었지.

그가 남긴 유산

판쩌우찐은 “총보다 교육이 강하다”고

말했던 사람이고, “자유로운 시민이 있어야

자유로운 나라가 있다”고 외쳤던 사상가야.

그가 남긴 생각들은 뒤이어 등장하는

'호치민'의 초기 사상에도 큰 영향을 줬고,
현대 베트남이 말하는

인권, 시민, 교육의 중요성에도
기초가 되어 있어.

 

그는 비록 무장 독립운동의 영웅은 아니지만,
사상과 철학으로 나라를 바꿔보려 했던

가장 진지한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어.

 

비록 판쩌우찐의 길은 쉽고 빠르진 않았지만,
백성이 스스로 깨어날 때

진짜 독립이 가능하다는 걸 가르쳐준

소중한 시도였어.

 

그가 없었다면 베트남 독립운동은

더 늦어졌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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