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찐씨와 응우옌씨라는 두 가문이
각각 북과 남을 차지하면서
분열 구조가 더 강화되고,
왕은 그냥 상징으로 남고,
실질적인 권력은 지방 군벌들이
쥐게 되는 시기로 넘어가게 돼.
찐씨(Trịnh)와 응우옌씨(Nguyễn)라는
두 강력한 지방 가문이
후레 왕조의 이름 아래 서로
남북으로 나뉘어 대립한 시기야.
참고로 '찐씨' 또는 '쩐씨'는 앞서 말한
'쩐왕조'와는 다른
'후레 왕조' 말기 귀족 출신이야.
찐씨 정권
후 레 왕조 가 막 왕조 에게 한번 멸망했다가 다시 재건된 후, 중흥 후여조를 세우기 위해 공을 세운 정씨(鄭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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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위키
왕은 존재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있지 않았고,
찐씨는 북부 하노이,
응우옌씨는 남부 후에를 중심으로
각자의 땅에서 나라처럼 움직이기 시작했지.
이건 그냥 정권 다툼이 아니라,
베트남 역사에서 ‘남과 북’이 서로 다르게
발전하게 된 진짜 시작이기도 해.
후레 왕조는 있었지만 왕이 다스리진 못했어
후레 왕조는 이름만 있었고,
진짜 권력은 찐씨 가문이라는
북부 귀족 가문이 쥐고 있었어.
왕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였고,
정치·군사·경제 모든 실권은
찐씨가 쥐고 다 움직였지.
이걸 보고 사람들은
"왕은 있지만, 말은 찐씨가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어.
응우옌씨, 남쪽에서 독자 세력으로 성장하다
반면에 남쪽에서는
응우옌씨 가문이 점점 강해졌어.
원래 찐씨와 같은 왕조 아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다스리겠다" 는 입장을 취하게 되지.
응우옌씨 정권
중흥 레 왕조 가 성립된 후, 찐씨 정권 과 함께 대월 을 실질적으로 양분한 제후국. 명목상으론 후 레 왕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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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수도를 남쪽의 '후에(Huế)'로 삼고,
자체적인 행정, 군사 조직을 갖추면서
사실상 독립된 정부처럼 움직이게 돼.
두 가문, 같은 왕을 모시며 서로 싸우다
이 상황이 아이러니한 건,
찐씨와 응우옌씨 모두
후레 왕조의 왕을 인정했지만,
사실상 서로 다른 나라처럼 행동하면서
남북 전쟁을 벌였다는 거야.
이게 바로 '찐–응우옌 전쟁'이야.
1627년부터 1672년까지
거의 50년 가까이 싸웠고,
그 후에도 휴전과 긴장이 계속됐어.
찐씨는 북쪽(당시 수도 탕롱,
지금의 하노이)을,
응우옌씨는 남쪽(후에와 그 아래 지방)
을 차지하고 있었지.
전쟁은 끝났지만, 분열은 계속됐다
결국 두 가문은 뚜렷한 승자 없이
남과 북이 서로 인정하는 모양새로
전쟁을 멈췄지만,
나라 전체는 두 개로 갈라진 상태였어.
백성들은 국경을 넘기도 어렵고,
거래나 교류도 제한돼 있었지.
그런데 이게 단순한 정치적 분열로
끝난 게 아니라 문화와 생활 방식까지
남북이 서로 다르게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돼.
남쪽은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분위기, 북쪽은 보수적이고 유교 중심
북쪽의 찐씨 세력은 전통적인
유교 문화, 문관 중심 정치를 강조했어.
교육과 행정이 중요했고,
형식과 예법을 중시했지.
반면에 응우옌씨가 다스리던 남쪽은
상업과 개척, 군사력 중심의
실용적 통치가 더 강했어.
개방적이고 변화에 유연한
분위기가 있었지.
이런 차이는 나중에 베트남 전체가
통일될 때도 남북이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움직이게 된 배경이 되기도 해.
정리하자면 찐씨와 응우옌씨의 분열은
한 나라 안에서 두 개의 실질적인
정권이 갈라진 사례였고,
왕조는 남아 있었지만
백성들에게는 누가 진짜 왕인지,
어디가 진짜 수도인지조차 불분명한 시대였어.
하지만 이 분열 속에서도
각자의 방식대로 정치와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후대 베트남에 남긴 영향은
꽤 크다고 볼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