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쯩) 자매 이후에도
중국의 지배는 계속되었고,
하지만 끊이지 않는 저항과 자주성의
씨앗도 계속 뿌려졌어.
이제 그 다음은 한나라 이후 수백 년 간
베트남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그리고 다시 독립의 불씨를 피우기 위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보려고 해.
이제 베트남 역사의 아주 긴 그림자,
바로 중국의 천 년 지배 시대로 들어가볼게.
이 시기는 겉으로 보면 지배당한 역사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저항하고,
문화를 지키고, 때를 기다려온 시간이기도 해.
천 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이름은 바뀌었고, 왕도 없었지만,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독립의 불꽃이 살아 있었던 시기야.
이름을 빼앗겨도, 마음은 빼앗기지 않았다
징 자매가 순국한 이후, 다시 중국의 그림자
기원후 43년, 징 자매의 항쟁이 끝나자
한나라는 본격적으로 베트남 북부를
완전히 편입했어.
이 지역은 ‘교지군(交趾郡)’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중국식 행정, 세금, 유교 체계, 문자 등이
강제로 도입되기 시작했지.
이후 한나라가 무너지고
오나라 → 진나라 → 수나라 → 당나라 등
중국 왕조가 바뀔 때마다
베트남도 함께 중국 왕조의
지방 행정 구역처럼 다뤄졌어.
그래도 이건 단순한 복속이 아니었어
겉으로는 중국 관료가 다스렸지만,
속으로는 지역 토착 세력들이 살아 있었고,
농민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공동체를 운영했어.
즉, 정치적으로는 종속되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던 거야.
한자를 배우고, 유교를 받아들이면서도…
이 시기 베트남은
중국 한자를 공식 문자로 사용했고,
유교 시험 제도, 관료 체계,
불교와 도교 사상도 함께 유입됐어.
베트남은 이걸 그대로 복사한 게 아니라,
자기 식대로 재해석하고 융합해 나갔어.
불교는 민간 신앙과 결합해
더 대중적으로 퍼졌고
도교는 무속과 섞여서 정령 신앙,
기복 신앙으로 바뀌었지.
유교는 엘리트 교육과 정치 체계로 쓰였지만,
공동체 중심의 전통적 질서는
그대로 유지됐어.
이건 나중에 독립 왕조가 세워졌을 때
중국과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정체성을 만드는 기반이 되었어.
중간중간 반란은 계속됐어
베트남 사람들이 천 년 동안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던 건 아니야.
당나라 말기엔 반란이 너무 많아
통제력이 약해질 정도였어.
이건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우리도 왕이 되어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다'는 믿음이
민중 속에 여전히 살아 있었던 증거야.
이름은 계속 바뀌었지만, 나라는 살아 있었어
중국은 이 지역을
- 교지군,
-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 안남절도사(安南節度使) 등
이름을 바꿔가며 다스렸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그 속에서도 ‘남국(南國)’,
즉 우리 땅이라는 자의식을 계속 지켜나갔어.
이게 훗날
독립 왕조가 세워졌을 때
왜 그렇게 빨리 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주는 거야.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배당하고도 정체성을 지킨다는 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야.
징(쯩) 자매의 항쟁이 그 불꽃을 지폈다면,
천 년이라는 기간은 그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민중이 품속에 소중히 감싸 안고 있던 시간이었지.
그리고 마침내, 그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는 순간이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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