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주인공은 레자 샤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야.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개혁을 계속했지만,
민주주의 열망, 석유 국유화, 미국의 개입,
그리고 이슬람 세력의 부상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맞서게 돼.
이제 이란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 가까워졌어.
바로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앞두고,
그 직전 수십 년 동안 나라 안에서 벌어진
갈등과 충돌을 이해하는 게 중요해.
이야기의 중심은 팔라비 왕조의 마지막 왕,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석유, 개혁, 독재,
미국, 종교 세력, 민중의 분노야.
이제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하지.
석유, 독재, 그리고 민중의 분노
아버지를 이어받은 왕, 기대도 컸지만...
1941년, 레자 샤가 영국과 소련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하자,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왕위를 이어받았어.
당시는 겨우 스물두 살.
많은 사람들이 “이제 젊은 왕이니까
좀 다르지 않을까?”라고 기대했지.
초반에는 말 그대로
상징적인 군주에 가까웠어.
하지만 곧 그는 아버지보다도
더 강한 권력을 쥐게 돼.
정치와 석유의 중심, 모사데그 총리의 등장이 시작이었다
1951년, 국민의 열망을 등에 업은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가
이란 석유를 국유화하자고 선언해.
당연히 이건 영국 입장에선 큰일이었지.
왜냐하면 당시 이란 석유 수익의 대부분은
영국 회사(지금의 BP)가 가져가고 있었거든.
모사데그는 국민의 지지를 받았고,
정말로 석유를 국유화해버려.
이건 이란 역사에서 진짜 자주권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었어.
CIA와 영국 정보부의 쿠데타 – 1953년의 충격
이 흐름을 막기 위해,
영국과 미국(CIA)은 비밀리에 쿠데타를 계획해.
1953년, 쿠데타로 모사데그 정권을 무너뜨리고,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다시 강한 왕으로 복귀하게 돼.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이란과 미국 사이의
깊은 불신의 뿌리가 돼.
백색 혁명 – 근대화를 향한 또 하나의 시도
왕은 이후, ‘백색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농지개혁, 여성 참정권, 문맹 퇴치,
공장 노동자 주식 참여 제도 등
여러 가지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어.
표면적으로는 좋은 제도였지만,
그 속엔 민중의 감정, 종교계의 반발,
계층 간 갈등을 무시한 측면이 컸어.
- 지주들은 몰락했고,
- 농민들은 제대로 된 땅을 받지 못했고,
- 종교계는 왕이 이슬람 전통을 파괴하고 있다고 격분했어.
경제는 발전했지만, 불평등은 심해졌어
석유 덕분에 경제는 외형적으로 성장했지만,
부는 왕과 귀족, 군부, 외국 기업에 집중됐고
대다수 국민은 여전히 빈곤과 불만 속에 있었어.
게다가 왕의 권력은 점점 강해졌고,
비밀경찰인 사바크(SAVAK)는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 고문, 감시하면서
공포 정치가 자리잡았지.
이슬람 지도자 호메이니의 등장은 불꽃을 붙인 사건
1960~70년대에 들어서며,
왕정에 대한 비판을 가장 강하게 했던 인물이
바로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야.
그는 종교 지도자이자 철학자였고,
“이슬람과 민중을 배신한 왕정은
무너져야 한다”고 주장했어.
왕은 그를 체포하고 결국 추방했지만,
호메이니는 해외에서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얻게 돼.
그의 연설, 글, 녹음테이프는
이란 전역에 몰래 퍼졌고,
그는 점점 민중의 상징으로 떠오르지.
그리고 마침내, 혁명의 불꽃이 타오르다
1970년대 후반,
경제난, 부정부패, 종교 탄압,
정치 억압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이란 전역에서 시위와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해.
- 노동자 파업
- 대학생 시위
- 종교계의 저항
- 도시에서의 대규모 반왕정 시위
왕은 처음엔 무력 진압을 시도했지만,
결국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1979년 초,
이란을 떠나 망명길에 오르게 돼.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분명
근대화와 경제 성장이라는 결과도 만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유, 자주성, 전통, 민중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억압했어.
그 결과, 이란은 근대국가로의 진입이 아니라,
정반대인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