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영국 식민 통치가 해협 식민지를 넘어서
말레이 반도 전체로 확장되는 시기,
바로 ‘보호령’ 체제의 시대로 들어가 보려고 해.
이건 단순한 정복이 아니라,
왕은 남겨두고 실권은 영국이 가져가는 방식,
즉 겉은 말레이 술탄국이지만
속은 식민지인 구조였어.
19세기 후반, 영국은
페낭, 말라카,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한
해협 식민지 체제를 다진 뒤,
말레이 반도 내륙으로 조금씩 영향력을
넓혀가기 시작했어.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어. 주석(Tin, 통, 깡통)
때문이었지.
당시 세계에서 주석은 식기, 통조림, 산업재료로
엄청난 수요가 있었고, 말레이 반도는
세계 최대의 '주석' 생산지 중 하나였거든.
페라크(페락)와 셀랑고르(슬랑오르), 네게리 셈빌란, 파항 – 네 개의 핵심 주
이 지역들은 원래 각각 독립된 말레이 술탄국이었어.
하지만 영국은 ‘보호 조약’을 제안하면서
“우리가 행정과 외교를 도와줄게”라며
자연스럽게 내정에 개입하기 시작했지.
이걸 ‘영국 보호령(Federated Malay States)’
이라고 불러. 겉으론 왕이 있고
술탄국 형태를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영국인 ‘레지던트’가 옆에 앉아서 모든 걸 조정했어.
간접통치의 방식
영국은 일부러 말레이 전통 권위인 술탄을 유지했어.
왜냐하면 술탄이 있으면 백성들에게는
“우리는 여전히 우리 왕을 모시고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줄 수 있었거든.
하지만 실제로는 세금, 법률, 교육, 광산 허가권,
외교 협상 전부 영국 관리의 손에 있었지.
이건 무력 없이 권력을 가져가는 가장 영리한
식민지 전략이었어.
경제와 사회의 변화
영국은 주석 채굴과 고무 농장을 확대하면서
수많은 노동자를 중국과 인도에서 불러들였어.
이 시기부터 말레이인은 농촌 중심,
중국계는 광산과 상업, 인도계는 고무 농장
노동자라는 인종별 역할 구조가 형성돼.
이건 지금까지도 말레이시아 사회에
‘다민족, 다계층 구조’로 남아 있는 뿌리야.
교육과 행정의 변화
영국은 일부 말레이 귀족 자제들만을 위한
엘리트 교육기관을 만들고, 평범한 말레이인은
영어 교육과 행정에서 배제했어.
이건 의도적으로 ‘지배받는 민족’으로 남게 하기
위한 방식이었고, 말레이계와 비말레이계 사이의
경제·교육 격차를 심화시켰지.
말레이 민족주의의 씨앗
하지만 이런 억압 속에서도 점점 말레이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왜 스스로 나라를 운영하지
못하지?"라는 질문이 생겨났고,
이는 훗날 말레이 민족주의 운동의 뿌리가 되기 시작했어.
말레이시아 사회는 이때 경제, 인종, 교육, 정치
구조의 틀이 크게 재편되었는데 이건 훗날
독립 이후에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남기게 됐지.